[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3>방을 보여주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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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보여주다
―이정주(1953∼)

낮잠 속으로 영감이 들어왔다. 영감은 아래턱으로 허술한 틀니를 자꾸 깨물었다. 노파가 따라 들어왔다. 나는 이불을 개켰다. 아, 괜찮아. 잠시 구경만 하고 갈 거야. 나는 손빗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골랐다. 책이 많네. 공부하는 양반이우. 나는 아무 말 않고 서 있었다. 책들을 버려야지. 불태워 버려야지. 내 얼굴에 불길이 확 치솟았다. 싱크대에 그릇들이 넘쳐나 있었다. 혼자 자취하는 모양이네. 우리 딸도 혼자 살아요. 그러나 걔는 짐이 이렇게 많지 않아. 짐들도 버려야지. 모두 갖다 버려야지. 나는 양손을 비비며 서 있었다. 햇볕도 잘 들고 혼자 살기 딱 알맞네. 노파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 아, 그럼. 도시가스 들어오고 방도 따뜻하대요. 영감은 신발을 꿰며 소리쳤다. 노파는 내 얼굴을 빠안히 쳐다보며 말했다. 왜 나갈려고 그러시오? 나는 한참 눈을 껌벅거렸다. 그리고 손날로 허공을 찌르며 말했다. 먼 데로 가려고 합니다. 먼 데로? 노파의 눈이 내 손끝을 따라왔다. 노파도 같이 가고 싶은 얼굴이었다. 갑자기 현관이 멀어지고 나도 뒤로 엄청 물러나 있었다. 노파는 화장실 앞에서 갑자기 아득해진 공간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멀리 현관 밖에서 영감이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화자의 사는 모양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여기저기 쌓이고 흩어져 있는 책들, 싱크대에 넘쳐나는 그릇들, 방바닥 한가득 펼쳐진 이부자리, 혼곤한 낮잠. 여기 불쑥 낯선 이들이 들어선다. 낯선 이들이 구석구석 살핀다. 변기도 당연히 들여다보고, 그 결에 뭉쳐 놨거나 널어놓은 속옷까지 보리라. 단칸방에 살다가 이사를 하자면 구차스러운 이 과정을 감수해야 한다. 방이나 보고 얼른 나갈 것이지, 할머니는 따님이 살게 될지 모를 방의 현재 거주자한테 궁금한 게 많으시다. 왜 나가려고 그러시오? 뚱하니 입 다물고 있던 화자도 이에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도시가스 들어오고 따뜻한, 햇볕 잘 들고 혼자 살기 딱 알맞은 방. 여기도 누군가에게는 ‘먼 데’이리라.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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