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정미경]스토리가 있는 대선 후보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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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 워싱턴 특파원
정미경 워싱턴 특파원
“침대에 누워있는 내 딸을 내려다보며 눈물을 글썽거리던 그를 잊을 수 없습니다. 남들에게 그는 성공한 정치인, 기업가로 보이겠지만 저에게는 따뜻한 이웃으로 기억됩니다.”

지난달 27∼30일 열린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가장 많은 박수를 받은 연설자는 유명한 정치인이나 영화배우가 아닌 팸 핀레이슨이라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는 연단에 올라 30여 년 전 보스턴에서 같은 교회에 다니던 ‘평범한 밋 롬니’를 이야기했다. 그가 기억하는 롬니는 인간적인 면모가 부족한 대선 후보가 아니라 자신의 아픈 딸을 위해 매일 병원을 찾아 기도해주고 직접 음식까지 만들어 위로 파티를 열어준 정 많은 이웃이었다.

핀레이슨 씨 외에도 과거 롬니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이 이번 전당대회 연단에 올랐다. 미국 전당대회에서 이렇게 일반인들이 대거 연사로 등장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들이 전당대회의 하이라이트인 마지막 날 롬니 후보 수락 연설이 있기 전에 등장한 것은 ‘극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유권자들은 대선 후보가 전해주는 ‘감동의 내러티브’를 좋아한다. 베트남전쟁에서 5년 동안 전쟁포로로 잡혀 있었어도 적에게 굴복하지 않다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석방된 존 매케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전쟁 영웅’ 내러티브는 2008년 대선을 장식했다. 당시 민주당 쪽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남편의 바람기를 참아내며 도전하는 곳마다 ‘유리천장’을 깨면서 진취적인 삶을 살아온 ‘여성 롤 모델’의 전형이었다.

버락 오바마 후보는 ‘미국의 꿈’을 보여줬다. 케냐 출신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젊은이로 시카고 슬럼가에서 시민운동을 하다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하버드 로스쿨에 들어가 정치권에 입문해 초선 상원의원으로 대권에 도전한 그의 스토리는 유권자들에게 강한 감동을 전해줬다.

그동안 대선 후보 롬니의 최대 약점은 ‘스토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유권자들의 공감을 사기는커녕 질투와 시샘을 받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선택받은 소수’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력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다.

‘백만장자 기업가에 주지사를 지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사립 초중고교를 다닌 후 1960년대 말 다른 젊은이들이 베트남전 참전을 고민할 때 프랑스로 선교활동을 다녀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투자회사를 세워 큰 재산을 모았다.’

스토리가 부족한 롬니가 평범한 동료와 이웃의 입을 통해 보여주려는 내러티브는 그가 누리는 부와 성공 명예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었다(I built it)’는 것이었다.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롬니는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기업가 정신’을 자신의 대선 브랜드로 만들려는 노력을 보여줬다. 이 노력이 얼마나 성공을 거둘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아직 유권자 호감도에서 롬니는 오바마에게 뒤지고 있다.

미국 선거 전문가들은 이번 대선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도가 떨어지는 이유를 감동지수가 낮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롬니뿐만 아니라 재선에 나선 오바마도 국민을 감동시킬 만한 스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2008년 오바마가 보여줬던 화합과 변화의 메시지는 미국 정치가 최악의 갈등관계로 치닫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설득력을 잃었다.

미국 정치 분석가 데이비드 애스먼은 유권자들이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냉소적이 될수록 더욱 감동적인 스토리를 찾는다고 했다. 석 달 앞으로 다가온 미국과 한국 대선에서 감동을 전해주는 후보는 누구일까.

정미경 워싱턴 특파원 mickey@donga.com
#미국 대선#유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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