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전에 이것만은…/고혜정]마흔 넘어 시작한 발레… ‘핑크돼지’라 놀려도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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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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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혜정 작가
혜정 작가
엄마, 나도 발레 허고 잡네.”

“빨래? 니가 뭔 빨래를 혀?”

“빨래가 아니고 발레. 엄마는 그것도 모릉가?”

“발레가 뭣이다냐?”

“제재소집 진영이같이 분홍색 옷 입고 머리에다 닭털 같은 것 꽂고 춤추는 것 말이여.”

“염병허든갑네. 거 춤추는 거 아녀? 그것은 돈이 엄청시리 많이 든다드만. 아야, 그런 것은 제재소집 딸이나 허는 것이제. 너 같은 애기가 허는 것이 아니어야.”

“오메, 나도 허고 잡은디. 나도 분홍색 옷 입고 춤추고 잡은디.”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우리 학교에서 딱 한 명 발레를 하던 친구가 부러워 엄마에게 슬쩍 말했으나 우리 엄마는 내게 꿈도 꾸지 말라며 단칼에 잘라 버리셨다. 현실은 냉정했고, 전라도 시골 마을의 3남 1녀 중 장녀인 나는 발레를 동경만 하다가 차츰차츰 잊어갔던 거 같다.

2011년 11월. 매년 연말이면 왜 이렇게 심란한지. 정신없이 살았지만 해 놓은 거 없이 또 한 해가 간다는 생각에 울적했다. 나 자신을 돌아볼 겨를 없이 쫓겨 온 세월에 놀라 한숨을 쉬게 되는 때가 바로 11월 아닌가 싶다. 그러던 어느 날 찬바람에 덜덜 떨며 버스를 기다리던 내 눈에 보인 간판. 바로 발레학원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뛰고, 뭔가 지금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버스고 약속이고 다 잊은 채 발레학원으로 달려갔다. 발레학원은 5층.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기다릴 수가 없었다. 30년 넘게 기다려 온 일이었는데 그 순간은 단 1분 1초도 기다릴 수 없을 만큼 초조했고 지금 아니면 영영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숨을 헉헉대며 학원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몇몇 학부모와 발레 선생이 깜짝 놀라 쳐다봤다.

“바… 발레 하려고요. 성인반 있죠?”

“예, 근데 나이가?”

“별로 안 먹었어요. 성인반에 들게요, 왜요? 저 늙어서 안 돼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다들 직장인….”

“직장인반 아니잖아요?, 성인반이잖아요?”

“따라가실 수 있겠어요?”

“한번 해볼게요. 하다가 안 되면 제가 알아서 포기할게요. 등록 좀 시켜 주세요.”

일단 한 달 수강료를 내니, 연습복과 슈즈를 사란다. 그 망사 같은 스커트에 목과 가슴이 깊게 파인 분홍색 레오타드. 그리고 발끝으로 휙∼ 설 수 있는 발레슈즈. 당연히 사야지. 내가 얼마나 동경하던 것들인데.

근데 웬걸. 선생님이 내놓은 것은 진짜 폼 안 나는 연습복에 끈이 나풀나풀하고 매끈한 실크슈즈가 아니라 할머니 덧신 같은 발레슈즈.

“저, 이거 말고 좀 비싸더라도 저 액자에 있는 저런 발레복이랑 슈즈 사고 싶은데.”

“풋, 어머님 저건 어떤 경지에 올라야… 그러니까 어머님이 한 5년 정도 꾸준히 연습하신 다음에야… 지금은 이 연습복 입고 연습하시는 거예요.”

“5년, 그럼 내 나이가… ㅠㅠ.”

나는 분홍색 연습복과 분홍색 타이즈를 골라 입고 분홍 슈즈를 신었다. 말이 성인반이지 20대 중반 직장 여성들의 발레 교습이었기에 다들 젊고 날씬했다. 거기에 더 날씬해 보이겠다며 다들 검은색 연습복. 나만 분홍 연습복. 다들 20대 중반의 날씬하고 배가 납작한 오피스걸들. 나만 동글동글, 어쩜 이렇게 골고루 살이 쪄서 고등어 가운데 토막 같은지.

그렇게 나는 30여 년 전에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발레를 나이 마흔이 넘어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잘 따라하지도 못하고, 만날 땀을 흘리며 낑낑대지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지금 아니면 언제 내가 좋아하는 핑크색 옷을 입고 실컷 뛰어 보겠나. 지금 내가 쑥스럽고 나이 탓하면서 포기한다면 나는 평생 발레를 동경하기만 하다 죽은 여자가 되겠지. 이렇게라도 시작을 해서 낯선 동작들을 따라하면 나는 발레를 했던 여자가 되는 것이다.

이 나이에 발레에 도전한 용기에 내가 감격해서 가슴이 뭉클하기도 했다. 나는 발레리나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는 ‘백조의 호수’를 꿈꾸는 것도 아니다. 나는 용기 있는 내가 좋고, 발레를 했던 여자가 되는 것이 행복하다. 그래서 연습실 동료들에게 ‘핑크돼지’라고 불리면서 열심히 발레를 한다.

고혜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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