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정훈]‘배트맨’이 되고 싶은 판사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2월 6일 03시 00분


박정훈 사회부 차장
박정훈 사회부 차장
2008년 개봉한 걸작 ‘다크 나이트(Dark Knight·어둠의 기사)’는 배트맨 시리즈 중 유일하게 ‘배트맨’이 제목에 없는 영화다. 영화를 연출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배트맨과 조커의 전쟁을 ‘선과 악’의 구도로 그리지 않았다. 선과 악이 혼재돼 있는 현실과 그 속에서 갈등하는 인간 내면에 초점을 맞췄다. “내가 못 넘을 선은 없다”는 배트맨의 대사는 자신이 믿는 정의 실현을 위해 스스로 법 테두리 밖에 존재하는 ‘어둠의 기사’라는 본질을 드러낸다. 그는 선을 악처럼 행하고 악을 선처럼 행한다. 영화는 절대선의 추구가 ‘선악 동체(同體)의 혼종 괴물’을 낳을 수 있는 위험성을 지적한다.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현실 구원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일부 판사의 모습은 ‘다크 나이트’의 경고와 맥이 닿아 있다. 이 판사들은 사법부 출범 이후 만들어진 규범의 테두리를 넘어 사회 정의를 실현하려는 꿈을 꾸는 듯 행동했다. 그들은 이미 법복 대신 배트맨의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이들은 논란이 처음 제기됐을 때만 해도 “사적 공간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발을 빼다 이제는 ‘복면’까지 벗은 채 정면 승부로 맞서고 있다.

일부 판사는 현직 대통령을 악의 화신인 ‘조커’로 둔갑시켰다. 인천지법 최은배 판사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통과에 대해 “뼛속까지 친미인 대통령이 나라살림을 팔아먹었다”고 했다. 대통령을 매국노로 묘사한 그의 발언에서는 반영웅(Anti Hero)의 그늘마저 엿보인다. 창원지법 이정렬 판사는 ‘가카새끼’라는 말로 대통령을 법정 밖에서 심판했다. ‘가카의 빅엿’ 표현 등으로 재임용 탈락 위기에 몰린 서울북부지법 서기호 판사는 김정일 조문 논란 당시 ‘조의를 표한다고 써도 죄가 되느냐’는 질문에 “헷갈린다. 꼬투리를 잡아 불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아서”라고 답했다. 스스로 ‘선악의 카오스’에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후보자 매수를 위해 돈을 준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은 벌금형으로 풀어주고 돈을 받은 박명기 교수에겐 징역을 선고한 김형두 판사에게서도 법과 상식을 뛰어넘으려는 ‘어둠의 기사’의 단면이 보인다.

판사는 결코 ‘선출 권력’ 이상의 힘을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된다. 국민의 표로 구성된 입법부가 짜놓은 법의 틀 속에서 양심과 최소의 재량으로 선과 악을 판단해야 한다. 선악을 가르지만 선악 자체는 규정할 수 없다.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 판사의 숙명이다. 사법부의 권위가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힘 때문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자’라는 지위 때문이다. 사법부가 신뢰받지 못하면 사회의 틀은 유지되기 어렵다.

일부 판사가 영웅 행세를 하는 동안 사법부에 대한 불신은 이미 최고조로 차올랐다. 적지 않은 국민은 정치인만큼 판사도 믿지 않는다. 최은배 판사에 대해 한 누리꾼은 “뼛속까지 진보인 판사에게 걸리면 끝장”이라는 글을 올렸다. 석궁테러 판결을 재판이 아닌 ‘개판’으로 둔갑시킨 영화 ‘부러진 화살’에 환호하는 관객이 많은 것도 비슷한 이유다.

판사들이 재판으로 말하지 않고 법과 제도의 틀을 벗어나려는 순간 권위는 땅에 떨어진다. 재판 당사자는 그런 판사를 어쭙잖게 영웅 행세나 하는 존재쯤으로 폄훼한다. 니체가 경고한 ‘괴물 잡으려다 괴물로 변해가는 존재…’. 일부 판사들이 어둠을 지키는 배트맨과 같은 운명을 맞지 않을까 걱정이다.

박정훈 사회부 차장 sunshad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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