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전에 이것만은…/원철]3개 언어에 능통해 동양고전을 세계화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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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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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이제 인생을 반추해 볼 나이가 되었다. 살아갈 날보다도 살아온 날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되돌아본 기억은 별로 없다. 철부지이기도 하고 또 늘 해야 할 일이 많았던 까닭이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또 돌아서서 생각해 보니 사실 별로 손에 쥔 것이 없다. 하긴 인생이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하지 않았던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고 했으니 남는 게 없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은 뭔가 휑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 늘 뭔가를 남겨 두어야 한다는 또 다른 부채의식이 심연에서 스멀스멀 일어나고 있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봐야 그것도 욕심일 뿐이다. 살다 보면 이름이 남는 것이지, 이름을 남기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닌 탓이다.

지음(知音)이라고 했던가.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 거문고를 연주했고 그가 죽자 소리 내기를 그만두었다. 또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士爲知己者死)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족(自足)할 수 없는 사람에게 자족하라고 해봐야 그건 공염불에 불과하다. 눈 내린 날 흥에 겨워 벗을 찾아가다가 그 흥이 다하자 도중에 그대로 돌아왔다는, 대숲에 살던 은둔객처럼 제멋에 겨워 살 수 있다면 그것도 참으로 좋은 일이다. ‘죽어도 좋고 살면 더 좋고’라는 어록을 남긴 채 한 줌의 재로 사라진 그 도반의 말처럼 남이 몰라주더라도 제멋에 살면 될 일이고, 또 알아주면 알아주는 대로 그것 또한 괜찮은 일이라고 여길 것이다.

본래 ‘구닥다리’ 스타일이라 한문 고전에 관심이 많았다. 그 안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고 믿었고 또 그 속에서 충분히 행복했다. 해설을 달아 많은 이에게 전하고자 번역본을 내기도 했고, 쉽게 풀어서 생활 속에서 되살려 놓는 작업도 병행했다. 그래봐야 바닷물 가운데 표주박 하나만큼도 안 되는 미미한 양이긴 하지만.

젊은 시절 새로운 길을 따라 일본 중국 인도 유럽 미국 등으로 유학길을 나서는 수행 벗들을 보면서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원효 스님처럼 토종의 길을 뒤따라가는 것도 좋은 일이라 여겼다.

그러면서도 늘 한편으로 구나발타라 스님의 기적을 꿈꾸었다. 그는 인도 중부지방 출신이었다. 당시 양대 문명인 인도와 중국의 선진 문화를 고루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하지만 언어 장애로 인해 얼치기 주변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스님답게’ 인도 말을 중국어로 유창하게 바꿀 수 있는 동시통역의 능력을 갖게 해 달라고 정성을 다해 기도했다. 지성이면 감천인 법이다. 드디어 선신이 나타나 머리를 바꾸어주는 꿈을 꾼 것이다. 그날 이후로 양대 언어가 유창해졌다.

현대인도 고대인도 아닌 얼치기 삶 속에서 현대인이면서 동시에 고대인이길 원했다. 고전한문 독해력으로 나름 행세하며 금생을 버텨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세계는 지척이 되어 갔다. 현대와 고대를 동시에 아우르기 위해선 영어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하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하지만 ‘죽기 전에 이것만은’ 이미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안 지도 꽤 되었다. 그래서 ‘죽고 난 이후의’ 약속으로 넘겼다. 다시 태어난다면 젊은 나이에 문화대국 몇 나라의 유학을 마치고 더불어 3개 언어에 능통하여 동양고전과 한국의 명저를 세계화하겠다는 원력으로 바꾸었다. 혹여 구나발타라 스님처럼 기도 기적을 통해 죽기 전에 3개 언어를 마스터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만.

원철 전 조계종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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