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고기정]칠레 광원 33인, 중국 광원 19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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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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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8월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에서 탄광 붕괴 사고가 발생했다. 매몰 광원 19명이 7일 만에 극적으로 구조됐다. 관영 언론들이 일제히 대문짝만 하게 구조 사실을 보도했다. 기사로만 보면 잘 짜인 휴먼스토리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바닥에 고여 있는 흙탕물을 마시며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일주일을 버텼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코끝이 찡하고 가슴을 뛰게 하는 ‘감동’이 없었다. 나만 그런가 싶어 중국인 몇에게 물었더니 ‘그게 뭐 대수냐’는 반응이었다.

칠레 광원 33명이 69일 만에 구조돼 국제적인 주목을 끈 게 1년여 전이다. 매몰 기간이 길다는 게 다르다면 다를 뿐, 중국의 경우와 이야기 구조는 비슷하다. 하지만 칠레의 광원 33명은 세계인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구조 과정이 생중계됐을 뿐 아니라 광원들의 삶 하나하나가 주목을 받으며 토크쇼에 나오는 등 유명인사들이 됐다. 1년여가 지나는 동안 그들 중 일부가 사회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조차 작은 연민을 느끼게 했다. 반면 중국의 광원 19명은 자국 내에서조차 잊혀진 존재들이다.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미국 예일대 폴 블룸 심리학과 교수는 이를 ‘본질주의’로 풀이한다. 호랑이의 겉모양이 서서히 사자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사진을 보여줬더니 어린이들은 맨 나중 사진을 보고도 호랑이라고 했다. 블룸 교수는 “호랑이가 가죽이 바뀌어도 호랑이라고 하는 이유는 겉모습이 달라져도 보이지 않는 속성, 즉 가죽 밑의 살과 뼈가 그대로라고 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본질주의는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본질은 습득된 구체적인 정보들을 토대로 해 견고한 사고체계로 굳어진다.

중국인이 학습한 ‘탄광의 본질’은 탐욕, 은폐, 거짓인 듯하다. 지난해 발생한 중국 내 광산 사고는 1403건. 이 과정에서 광원 2433명이 숨졌다. 중국의 석탄 채굴량은 연간 30억 t으로 전 세계의 40%를 차지한다. 전 세계에서 탄광 사고로 숨지는 광원 중 80%는 중국인이라는 통계도 있다. 석탄 1만 t을 채굴하는 데 희생되는 광원이 2007년 기준으로 2.041명이다. 주요 선진국보다 50배나 높다.

중국 탄광 산업이 이렇게 된 데는 돈벌이에 급급한 업주들이 안전설비를 제대로 마련하지 않은 탓이다. 여기에 무면허 업체들이 난립해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인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부패하고 무능한 지방정부는 이런 사실을 모두 눈감아준다. 이달 중순 대형 폭발사고가 난 윈난(雲南) 성의 어느 탄광에서는 한 고위 간부가 사건 발생 당시 갱도 안에서 근무했던 것처럼 보이려고 얼굴에 석탄 칠까지 한 사실이 발각됐다. 그는 안전감독 규정에 따라 갱도 내에서 당직을 서야 했지만 무시해 버렸다. 그동안은 지방정부가 이를 알고도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중국 사람들이 매몰 광원 귀환 뉴스에 심드렁하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광원들이 수십 일씩 갇혀 있다 극적으로 구조되더라도 해당 사고는 탄광산업을 둘러싼 부정적 이미지를 재확인시키고 강화해주는 ‘또 하나의 탄광 사고’로만 인지되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본질이 바뀌지 않는 한 그 어떤 포장이나 이벤트에도 사람들은 별다른 감동을 느끼지 않는다. 한국에서 요즘 많은 정치인이 변신 노력을 하지만 젊은이들의 반응이 미지근한 것도 본질의 변화가 아니라고 인식하기 때문 아닐까. 한국 정치권이 툭하면 당명을 바꾸고, 환골탈태를 외치지만 본질을 바꾸려는 노력이 병행되지 않는 한 국민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기 어려울 것이다.

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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