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형삼]내부 비판이 실종된 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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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5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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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삼 논설위원
이형삼 논설위원
‘까칠한 아이가 타고 있어요.’ 앞차 뒷유리에 붙여놓은 글귀를 보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외부 자극에 예민한 장애아를 태운 모양이었다. 두어 달 뒤 ‘까칠합니다. 건들지 마세요’라고 써 붙인 차가 내 앞에 불쑥 끼어들었을 때야 그런 뜻이 아니란 걸 알았다. ‘나, 성질 고약하니까 험한 꼴 보지 말고 피해 가라’는 의미였다. 지난 주말, 신호대기 중인 차들 사이를 비집고 빠져나가던 오토바이의 빨간색 수납함엔 괴기영화 제목 서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저도 제가 무서워요.’

내가 난폭운전 하는 건 괜찮고 남이 허튼짓 하는 건 못 참는다는 ‘특수계층’이 도로 위에만 있을까. 제주해군기지 시위대는 공무 집행하는 군인들의 정강이를 예사로 걷어찼다. 서울 도심에 진출한 ‘희망버스’ 집회 참가자는 교통체증에 항의하는 택시 기사를 폭행했다. 이마에 붉은 띠만 두르면 치외법권을 인정받은 듯 설치는 그들 앞에서 공권력조차 뒷걸음질을 친다. 좌파 운동권의 불법행위 현장이 신성불가침의 성지(聖地)가 돼 가고 있다.

신성불가침 좌파 행각의 압권은 ‘곽노현 구하기’를 내건 십자군전쟁이다. ‘반(反)부패’를 입에 달고 살던 좌파 진영이 초기의 사퇴론을 잠재우고 일사불란하게 곽 교육감 옹호에 나선 것은 사퇴한 후보자에게 돈을 건넨 사실을 부정해서가 아니다. 놀랍게도 그 이유는 곽 교육감이 ‘야권 연대와 통합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연대와 통합’이라는 신탁(神託)을 떠받드는 좌파의 성지에서 속법(俗法)의 존재감은 하잘것없어 보인다.

좌파 진영에겐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 이후 행정부와 입법부를 모두 장악하고도 대동단결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다. 좌파는 탄핵 역풍 덕에 총선에서 압승하며 ‘불판’을 갈아 치울 기회를 잡았지만 이라크 파병, 대연정 제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노 대통령과의 차별화 등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내분을 겪다가 결국 우파에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그러다 지난해 6·2 지방선거와 올해 4·27 재·보선에서 세력을 불리고 8·24 서울시 주민투표마저 무산시키자 내년 총선·대선을 겨냥해 ‘뭉쳐야 산다’는 연대의식이 다시금 절실해졌다.

곽노현 사태에서 상식 밖의 옹호론으로 전환한 것은 권력을 향해 공든 탑을 쌓아올린 마당에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위기감이 고조된 때문일 것이다.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막는 악수(惡手)다. 노선과 정체성을 따지지 않는 민주노동당-진보신당의 ‘묻지 마 통합’ 추진이 실패로 귀결된 것도 암울한 전조로 받아들여야 한다.

독일 태생의 미국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1906∼1975)는 나치의 대량학살을 도운 혐의로 체포된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고 ‘악(惡)의 평범성’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아이히만은 악마가 아니라 맡은 일만을 충실하게 해낸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에겐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없었다. 자신이 하는 일의 결과와 의미, 그에 따른 타인의 이해관계를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 악은 그렇게 평범한 모습을 하고 뿌리를 내린다.

자성(自省)과 내부 비판이 실종된 좌파는 진보의 미덕을 꽃피울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이 우파 오류의 부산물로 보는 획일적 일차원적 전체주의적 요소를 체현할 위험이 있다. 한국의 좌파는 자신이 지금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다고 믿는 일 자체에만 몰두한 나머지 그 결과와 의미를 못 헤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타인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능력을 일부러 퇴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형삼 논설위원 h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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