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배융호]장애-비장애인 구분없는 디자인을

  • 동아일보

배융호 장애물없는생활환경 시민연대 사무총장
배융호 장애물없는생활환경 시민연대 사무총장
4월 10일은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편의증진법)’이 시행된 지 만 13년이 되는 날이었다. 장애인의 건물 이용과 접근이 거의 보장되지 않았던 1998년에 편의증진법이 시행됐다. 그 후 우리나라의 접근성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편의시설 설치율은 1998년 48.5%에서 2008년 77.5%로 증가했고 신축 건물에는 경사로, 엘리베이터, 장애인용 화장실 등 기본적인 편의시설이 만들어졌다. 지난 10여 년간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접근성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게 좋아졌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다. 편의시설 설치율은 77.5%이지만 적정 설치율은 55.8%에 불과하다. 장애인이 실제로 건물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비율이 고작 55.8% 수준이라는 뜻이다. 또 엘리베이터나 장애인용 화장실 같은 편의시설은 잘돼 있지만, 건물 전체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가를 평가하는 이동성이나 연계성 측면에서 보면 접근성은 여전히 낮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편의시설이 부족해 편의시설 설치를 증진하는 정책을 추진해 왔지만 이제 어느 정도 갖추어져 편의시설 설치만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편의시설 설치 위주의 정책은 실질적인 장애인의 이용을 보장해주지 못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는 차별적 편의 증진 방법으로 급진전되는 노령화사회에 대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세계는 편의 증진의 방향을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 또는 유니버설 액세스(Universal Access)로 잡고 있다. 이는 말 그대로 장애인과 노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이용 가능하게 디자인하고, 자유롭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하철역 엘리베이터는 장애인과 노약자만 이용할 수 있고, 화장실도 장애인용과 비장애인용으로 구분돼 있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이처럼 장애인과 비장애인 등을 구분하지 말고 모든 사람이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2005년 유니버설 디자인을 주요 정책으로 삼고 ‘배리어프리신법(Barrier-Free新法)’을 제정했으며, 장애인 및 전문가 의견을 반영해 나고야 주부공항에 유니버설 디자인을 적용했다. 그 결과 공항에는 별도의 장애인용 화장실이 없다. 그 대신 장애인은 넓고 크게 만든 모든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 노르웨이는 유니버설 디자인을 국가정책으로 삼고 야심 차게 모든 환경을 유니버설 디자인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다. 대만도 교통정책에 있어 주요 기조를 유니버설 디자인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세계 각국이 앞다투어 유니버설 디자인을 주요 정책으로 추진하는 이유는 유니버설 디자인이 미래 사회에 대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유니버설 디자인을 적용할 경우 노령화사회에 대비할 수 있고, 장애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편리해지며, 그런 제품이나 디자인을 적용한 기업은 수요 창출 면에서 유리해진다. 예를 들어 음식점 입구에 계단이 없다면 장애인뿐 아니라 노인, 유모차를 미는 부모들,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도 고객으로 끌어들일 수 있어 계단이 있는 음식점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우리나라의 편의시설 및 편의 증진정책도 이제는 유니버설 디자인으로 나아가야 한다. 장애인만을 위한 특별한 시설이 아닌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이용하기가 편리한 디자인과 환경을 만드는 방향으로 정책이 수립돼야 한다. 지금부터 바꾸지 않는다면 미래에는 바꿀 수 없을 것이며, 그때는 더 많은 비용과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우리나라의 접근성 및 편의 증진의 미래는 유니버설 디자인에 달려 있다.

배융호 장애물없는생활환경 시민연대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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