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오랜 봉건체제를 거쳤고 주로 무장들이 정권을 전담했던 매우 엄혹한 계급사회였다. 칼을 찰 수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구분은 물론이고, 비올 때 우산을 쓸 수 있는 자와 쓸 수 없는 자의 구분까지 엄격하게 존재한 사회였다.
한중일의 동양 3국 중에서 유난히 일본에서만 봉건체제가 오래 지속된 것에는 일본의 자연조건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일까. 일본을 이해하려면 먼저 일본의 자연조건을 이해해야 한다. 일본은 지진이 잦아서 역사책에도 지진 관련 일화가 많이 등장하는 나라다.
지진의 공포는 끔찍하다.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이 흔들리고 꺼질 때, 도대체 무엇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일본인들의 정서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과도한 집단주의의 이면에는 그들이 천형(天刑)처럼 안고 있는 각박한 자연조건에서 비롯된 근원적인 불안감이 미친 영향도 있다고 느껴진다.
이번에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은 전 세계 시민에게 여러 측면에서 큰 충격을 주었다. 엄청난 강도에 지진해일(쓰나미)까지 동반한 처참한 파괴의 참혹함이 우선 충격적이었고, 대지진 초기에 일본인들이 질서 있고 침착하게 대처하던 모습은 또 다른 의미에서 충격을 줬다. 그래서 세계 각국에서 일본인들의 시민의식을 크게 상찬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일본의 시민의식은 인류의 정신이 진화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고 격찬했다.
日대지진, 인류 참화로 본 한국인
과거에 일본인들이 대지진의 참변에 추악하게 대처했던 뼈아픈 역사를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요즘의 일본인들이 대지진에 질서 있게 대처하는 모습에서 “인류의 정신이 진화한다는 사실”을 보아낸 영국 언론인의 시각이 반갑고 신선하다. 그리고 그에 적극 동의한다.
불과 88년 전인 1923년 9월 1일 일어난 간토(關東) 대지진 때, 일본인은 성난 야수였고 비열한 야만인이었다. 일본인은 관민이 일체가 되어 칼과 죽창을 들고 무고한 조선인을 처참하게 학살하면서 그들에게 닥쳤던 대지진의 참혹함과 공포를 견디었다. 당시 억울하게 살해당한 조선인 6000여 명의 피가 아직도 일본역사의 하늘을 떠돌며 원통함을 호소하고 있다.
그때에 비하면 어떠한가. 불과 88년이 흘렀을 뿐인데 현재 일본인이 대지진에 대처하는 자세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천양지차(天壤之差)가 있다. 요즘의 일본인은 침착하게 질서를 지키면서 가족과 이웃이 실종되고 죽어가는 참혹한 비극에 의연하게 대처했다. 그렇다. 요즘의 일본인이 그런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우리는 ‘인류의 정신이 진화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래서 참으로 고맙고 감격스럽다.
그런데 이번 동일본 대지진을 계기로 ‘인류의 정신이 진화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은 일본인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인 역시 같은 것을 보여주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계속 방영되는 동일본 대지진의 참화를 지켜보면서 한국인은 일본인의 고난을 자신의 고난으로 받아들였다. 땅이 갈라지고 거대한 해일이 도시를 삼켜 수많은 사상자가 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한국인들은 “‘일본인’이 대지진으로 고난을 겪는다”기보다는 “‘우리 인류의 한 부분’이 대지진으로 고난을 겪는다”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한국인은 동일본 대지진으로 ‘일본인들이’ 해일에 휩쓸려 사라지고 땅에 파묻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중 일부’가 그렇게 당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한국사회 각계각층에서 자발적으로 아주 자연스럽고 빠르게 ‘동일본 대지진 성금 모으기’가 시작됐다.
그러나 ‘인류 정신의 진화’는 역시 어려운 일인가. 그처럼 높이 칭송되던 일본인의 의연한 대지진 대처 자세에도 변화가 일어서 이제는 도처에서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고 생필품 사재기가 번지고 있다고 한다. 한국인의 맑고 순수한 자세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최근 일본 교과서에 실린 독도의 일본 영토 주장이 보도되면서, ‘독도’와 전혀 관련 없는 대지진 성금 전달에 심각한 반감을 표하는 견해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후퇴이다. 지금 한일 양국 국민들이 할 일은 ‘인류의 정신이 퇴보하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日독도 영유권 주장, 또 다른 침략
그리고 이제 일본인은 ‘독도’ 문제가 지닌 진정한 의의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일본이 한국인에게 그토록 큰 고통을 줬던 침략의 시기에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했던 일을 근거로 지금도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또 다른 부당한 침략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일본인이 간토 대지진 때 조선인에게 가했던 부당한 살육과 마찬가지의 참혹한 횡포에 해당한다. 독도문제에서도 ‘인류의 정신은 진화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상이 되도록 일본인의 시민의식이 진정한 진전을 이루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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