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입법권을 권력투쟁의 도구로 삼는 국회

  • 동아일보

지난달 말 경북 안동에서 처음 발생한 구제역이 거의 전국을 휩쓸고 다닌다. 어제까지 도살 처분한 소 돼지 사슴 염소가 29만9000여 마리에 이른다. 경제적 타격도 크지만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우던 가축을 땅에 묻어야 하는 축산농민은 가슴이 쓰리다. 바이러스가 퍼뜨리는 구제역의 원천적 예방은 쉽지 않은 과제이겠지만 정부와 정치권이 확산과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제 역할을 다했는지 뒤돌아봐야 할 것이다.

올 1월 경기 포천과 연천에서 구제역이 발생하고, 4월 인천 강화와 경기 김포에서도 구제역이 발생했다. 한나라당 김학용 의원이 6월 가축 소유주 등을 대상으로 해외여행 신고 의무를 강화하고 가축전염병 발병 원인 제공 시 불이익을 주는 내용 등을 담은 가축전염병예방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이 법안은 6개월이나 지난 이달 1일에야 농림수산식품위에 상정됐고 22일 겨우 상임위를 통과했다. 상임위 위원들이 소홀히 취급한 탓이 크다. 구제역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게 언제인데 왜 서둘러 이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의원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법안을 발의하고, 심의하고, 의결하는 일이다. 국익과 국민의 실생활에 직결된 법안은 내용에 못지않게 타이밍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다. 18대 의원들의 의안(議案) 표결 참여율이 60%대에 불과한 점만 보더라도 우리 의원들이 기본책무에 충실하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이 발의한 법안의 표결에 참여하지 않는 의원도 많으니 할 말을 잃을 정도다. 입법권을 당리당략(黨利黨略)이나 권력투쟁의 도구로 삼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의원들이 자신의 철학이나 소신에 따라 입법권을 행사하기보다는 소속 정당의 하수인 노릇을 하기에 바쁘다. 따지고 보면 국회폭력의 근본 원인도 여기서 비롯된다.

미국 상·하원 의원들의 의안 투표율은 95%가 넘는다. 그런데도 미 하원은 내년 1월부터 의원들의 모든 회의 참석 기록과 표결 결과를 웹 사이트를 통해 공개하기로 했다. 우리도 국회 홈페이지의 상임위와 본회의 회의록에 의원들의 참석 여부 등을 표기하지만 국민이 좀 더 쉽게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민의 시선을 의식하면 의원들이 법안 심의와 표결을 지금처럼 게을리할 수 없을 것이다. 국민이 입법활동을 감시해 투표로 심판해야만 의원들의 해이를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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