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름이 1인 구와 그 구를 비스듬하게 자르는 평면 사이에 있는 공간의 부피를 구하는 수학 문제가 있다. 미적분학의 고전적인 응용문제다. 미국의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보통 1학년 2학기에 배우는 내용이다. 필자가 1990년대 MIT에서 가르칠 무렵 수강생 중 절반 이하만이 이 문제를 제대로 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 대학의 평균적인 이공계 학생은 수학 문제의 해를 조리 있게 설명하는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럭저럭 정답을 맞힌 경우에도 해법을 질서정연하게 써낸 학생은 극히 드물었다.
포스텍 연산석좌교수를 겸직하게 되면서 몇 주 전 신입생 수시 면접시험에 면접관으로 들어갔다. 박사과정부터 외국에서 활동해 온 필자는 우리나라 입학시험에 대해서 소문과 잡담을 들어 왔을 뿐이고 주로 제도를 향해 비판적인 시각만 마주쳤던 것 같다. 하지만 이틀에 걸쳐 32명의 학생과 만나면서 본 한국 학생들의 실력은 놀랄 정도였다.
면접 당일 오전 7시, 교수들은 채점 기준을 논의하면서 하나같이 문제가 너무 어렵다고 우려했다. 면접 경험이 없는 필자는 누구보다도 걱정이 컸다. 면접관이 설명하는 시험 체제와 시험장 분위기부터 미국 학생들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성숙도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심층 문제 3개를 검사할 시간이 30분밖에 안 되고 그 직후 학생들은 20분 동안 교수 2명 앞에 서서 칠판에 자신이 생각한 바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야 했다.
첫 수험생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앳된 모습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그러나 필자의 걱정과 달리 수험생들은 대부분 칠판 앞에 서자마자 침착하고 당당하게 실력을 발휘했다. 엄격한 시간제한과 생소한 환경, 무자비한 압력 속에서 효율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을 자유자재로 펼쳐냈다. 이렇게 되기까지 필요한 훈련의 정도는 필자조차 상상하기 어려웠다. 영미 문화권에서는 주로 운동선수에게서나 기대하는 자제력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부피 문제는 1, 2명을 제외하고 모두 완벽하게 풀어냈다. 해외 유명 대학 미적분학 강좌에서조차 어려울 만한 문제가 이들에게는 간단한 연습에 불과한 듯했다. 풀이 과정을 구체적으로 묻자 명료하게 맞장구치는 탄력성이 ‘한국 교육=주입식 교육’이라는 선입관과 거리가 멀었다. 꽤 어려운 평면 기하문제를 격렬히 풀던 여학생이 있었다. 깊은 생각의 구렁에서 건져내기 위해 다섯 마디 정도의 힌트를 주자 “잠깐만요! 제가 생각하겠습니다”라고 하더니 5분도 채 안 돼 문제를 스스로 풀어냈다. 수학 전공 지망생 중에서는 논리의 초연한 전개만 보면 30년 가까이 수학만 공부해온 필자보다 높은 수준이라고 느껴지는 학생도 있었다.
필자는 미국과 영국의 대학에서 많은 학생을 지도해 왔다. 영미권에서 역시 우수한 학생을 많이 만났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집단의 층이 훨씬 두껍다고 느꼈다. 수학과 졸업생에 대한 금융회사 등의 수요가 늘면서 수학과가 기초과학 분야에서 최근 인기를 끌어 인재가 몰린 측면도 있다고 한다.
수많은 학생이 여러 해 동안 어려운 문제풀이에 인생의 초점을 전적으로 맞추는 상황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기는 힘들지 모른다. 그만큼 한국의 청소년들이 잃는 것이 많을 듯도 하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청춘은 얼마나 죽도록 괴로운 희열로 가득한가. 다만 종류가 서로 다를 뿐이다. 의미 있는 인생의 초석을 다듬어 가는 순간으로 수없는 낮밤을 채우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서 필자는 희망을 보았다. 이처럼 우수한 학생들이 각자의 길을 찾아 학교에서, 기업에서, 연구소에서 또는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기여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일은 필자를 포함한 어른들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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