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제균]대통령의 착각

  • 동아일보

주말 골퍼의 착각 시리즈.

첫 번째 착각은 남성 골퍼에겐 보편적이다. 자신의 드라이버 티샷이 적어도 200야드(약 183m)는 넘게 날아간다고 믿는 것. 골프 전문가와 캐디들에 따르면 200야드를 넘기는 주말 골퍼는 별로 많지 않다.

두 번째 착각은 드물지만 실제 일어나는 일이다. 그린 플레이를 마치고 나가면서 퍼터 대신에 홀 표시 깃발을 들고 나가는 경우. 나도 앞 팀 플레이어가 깃발을 들고 가는 모습을 보고 경악한 적이 있다. 대개 초보이거나 지나치게 자기 플레이에 집착했던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다.

자신만은 레임덕 없을 것으로 착각

세 번째 착각은 아무래도 우스개 같다. 벙커 샷을 한 뒤 고무래로 모래를 평평하게 다진 후 벙커 언저리에 놔둬야 할 고무래를 들고 가는 경우. 이 희한한 광경을 봤다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물론 이런 착각은 주말 골퍼라면 큰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대통령의 경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 아니 세계의 권력자들은 임기 초·중반까지는 적어도 자신에게만은 레임덕이 오지 않을 거라고 착각하곤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말인 2007년 5월에도 “정부 내에 레임덕이 없다”고 호언했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 절반을 맞은 8월 25일 ‘임기 반환점’이라는 표현에 이의를 제기했다. “반환점은 목적지를 다 가고 난 뒤 돌아오는 걸 말하는데, 대통령 임기는 앞으로 쭉 가는 것 아니냐”는 것.

그러나 ‘임기 반환점’만 해도 많이 봐준 표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적 단임 대통령제에서 임기 후반 레임덕은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임기 절반이 지나는 때는 단순한 반환점이 아니라 정상에 올랐던 대통령의 하산(下山)이 본격화되는 지점이다.

항간에는 ‘청와대가 무리하게 조현오 경찰청장 임명을 강행한 것은 차기 청장 임명권 행사를 통해 레임덕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란 얘기가 있다. 사실이 아니겠지만, 그런 발상을 했다면 200야드도 못 날리는 주말 골퍼가 워터 해저드 건너 250야드 지점을 겨냥했다가 볼을 물에 빠뜨리고 마는 것 같은 착각이다.

한국 대통령의 두 번째 착각은 차기 대선구도 개입이다.

대통령도 자신의 플레이가 끝나면 홀에 다시 깃발 꽂아두고 조용히 나가면 된다. 하지만 역대 대통령 가운데 자기 플레이에 집착하다가 다음 팀이 써야 할 깃발을 들고 나가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대통령도 벙커에 빠진다

이명박 대통령이 김태호 전 경남지사를 국무총리로 앉히려던 것은 노 전 대통령 임기 초 ‘정동영, 김근태 키우기’를 연상케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두 사람을 ‘장관→책임장관’으로 지명해 국정경험을 넓혀주려 했다. 대통령이 차기 구도에 개입하려 하면 할수록 산통이 깨지는 게 한국 대통령의 또 다른 숙명이다.

‘나만은 임기 말 게이트가 없을 것’이란 생각, 바로 세 번째 착각이다.

노 전 대통령은 2006년 8월 국무회의에서 “게이트는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결과가 어땠는가.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도 게이트의 수렁을 피하지 못했다.

MB 역시 알 수 없다. ‘대통령은 측근이 웬수’라는 말이 있듯, 게이트를 일으키는 건 대통령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의 인사청문회에서 드러난 이 정권의 도덕성 둔감증은 임기 말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골퍼도, 대통령도 벙커에 빠진다. 일단 벙커에 빠졌으면 깨끗이 인정하고, 볼(문제점)을 쳐내고, 고무래로 뒷정리해야 한다. 숨기려고 몰래 볼을 쳐내거나, 한꺼번에 만회하려고 무리한 샷을 시도하다간 그야말로 게이트의 늪으로 더 깊이 빠져든다. 그렇게 허둥지둥하다 고무래까지 들고 나오는 날엔 게임 전체를 잃을 수도 있다.

박제균 영상뉴스팀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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