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교육개혁’만큼 식상한 단어가 있을까. 5·16군사정부가 1962년 실시했다 2년 만에 폐지한 대학입학자격 국가고시제는 교육쇄신의 일환이었다.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대학졸업정원제를 근간으로 하는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이란 7·30교육개혁을 단행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도 교육개혁을 부르짖었지만 각종 정책이 명멸하는 가운데 입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사교육비는 치솟았다. 개혁이 현실을 개선하기는커녕 부담을 안겨줘 ‘개혁=새로운 혼란’이란 생각을 가진 학부모가 적지 않다. 이명박 정부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학생 학부모가 빠진 교육정책
어떤 개혁이든 실수요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혼돈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정부는 교육정책을 입안할 때 학계에 연구 용역을 주고 여론조사도 하고 공청회도 연다. 나름대로 역작(力作)이니 아무런 문제도 없어야 하지만 정부의 시안은 논란의 종착역이 아닌 시발점이 되고 공청회장은 난장판으로 변하고 만다. 학생과 학부모의 욕구를 충족하면서도 현실적으로 학교가 수용 가능한 정책만이 반론을 잠재우고 성공을 기약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선 철저한 현실 파악이 우선이지만 그렇지 못했다. 정부의 외고 개편안 발표 이후 벌어지는 일이 이를 입증한다. 자녀를 외고에 보내려는 학부모는 중학교 2, 3학년 영어성적, 학습계획서, 교장추천서로 압축된 전형요소에 자녀를 맞추느라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동분서주한다. 일부 학원은 입학사정관반, 자기주도학습반, 외고입시컨설팅반을 만들었다. 봉사활동으로 경쟁력을 쌓는 학생도 등장했다. 새 입시 정책에 어리둥절해하는 학교에 의지하기는 불안하다. 입시에는 싫든 좋든 경쟁이란 요소가 있고, 경쟁의 대가를 기꺼이 치르려는 학부모와 학생은 적지 않다. 정책이 이런 환경과 맞물려 어떤 모습으로 현실에 투영될지 충분히 들어보지 않고 내놓는 임기응변식 땜질정책은 학부모에게 재앙이며 또 다른 땜질을 부르게 된다.
혼란의 악순환을 끊으려면 교육개혁을 올해 국정과제로 삼은 이명박 대통령부터 귀를 열어야 하지만 대통령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할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가 역부족인 현실이 안타깝다. 과거에 비해 기능과 인원, 사무국이 대폭 축소된 탓이다. 현 자문회의는 교육위원 7명과 과학위원 7명, 부의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장은 대통령이다. 사무국에는 교육과학기술부의 파견 공무원 한 명과 계약직원 2명뿐이다. 노무현 정부는 위원 23명과 분과위 5개로 이뤄진 교육혁신위원회를 뒀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도 교육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정책을 입안하고 점검하는 자문기구에서 교육 철학을 세우고 정책의 큰 줄기를 그렸다. 현재 자문회의의 교육위원과 과학위원 모두 불만이다. 정책을 밀도 있게 다루지 못한다는 자조마저 들린다.
현장 목소리 전할 자문회의 필요
자문회의의 교육기능과 과학기능을 분리해 별개 기구로 만들어야 한다. 실무 부처인 교과부가 현장의 목소리를 수용하고 정책에 대한 평가까지 하기를 기대하기는 무리다. 대통령이 큰 귀를 갖고 교육현장을 생각해야 실무 부처의 귀가 쫑긋 서게 된다. 이래야 중구난방으로 쏟아지는 정책 대안에 대한 분별력이 생기고 교육 철학과 장기 비전이 힘을 받게 된다. 교육 실수요자의 속마음에 뿌리내린 정책이 있어야 ‘인재대국’이란 국정과제도 이뤄진다. 학생과 학부모가 원하는 다양한 학교, 자율성과 책임감을 갖춘 학교, 전문성을 갖춘 교원도 실제로 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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