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택]햇볕정책의 末路

  • 입력 2008년 12월 3일 20시 13분


햇볕정책의 옥동자라는 개성공단의 체류인원이 절반으로 줄고 개성관광과 화물철도 운행은 중단됐다. 10년 된 햇볕정책의 마지막 행로를 지켜보는 듯하다. 8조 원이 넘는 국민 세금이 들어간 정책이 실패로 끝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돌이켜 보면 북한과 그 지도자에 대한 오판과 환상에서 출발한 햇볕정책의 운명은 예정돼 있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우리의 살길은 북측으로 가는 것”이라며 “지하자원, 관광, 노동력 등에서 북한은 노다지와 같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은 아직도 9년 전 북한과 김정일에게 걸었던 기대와 환상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줄 뿐이다.

DJ는 남북정상회담을 극비리에 추진하던 2000년 3월 말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4·13) 선거 후에는 중동 특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규모 북한 특수가 있을 것”이라며 기대를 부풀렸다. “특히 중소기업들에 상상할 수 없을 규모로 투자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북한 특수는 없었다.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한가.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전인 5월 27일 임동원 국가정보원장은 김정일을 4시간 동안 면담하고 돌아왔다. 그는 DJ에게 “김정일은 김일성을 능가하는 강력한 통치자이자 북한에서 유일한 개방적 실용주의적 사고의 소유자”라고 보고했다. 핵을 개발하고 북한 노동자 3만5000명의 밥줄이 걸린 개성공단을 폐쇄하려는 지도자를 실용주의적 사고의 소유자라고 판단했다니 믿을 수가 없다.

북은 핵을 무기로 임기 말에 쫓기던 조지 W 부시 미국 행정부를 압박해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빠졌다. 외국 자본의 대북 투자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개성공단 실패를 보고 북한에 투자할 외국 기업이 있을까. 실용주의와는 거리가 먼 심각한 자해행위이며 고립을 자초하는 모험주의일 뿐이다.

집주인이 세입자를 내보내도 북한의 개성공단 체류인원처럼 내보내지는 않는다. 북의 ‘12·1 조치’는 남북 합의를 위반하고 무시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국민의 안전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햇볕정책 10년의 결과가 이렇다면 남북 간 합의가 무슨 소용인가. 남북 합의에서도 일반 계약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신의성실(信義誠實)의 원칙이 존중되고, 일방적 파기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 그게 안 통하는 합의는 정치적 이벤트에 불과하다.

햇볕정책은 북이 핵실험을 한 2006년 10월 9일 ‘뇌사 판정’을 받았다. 그날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 정부도 이 마당에 와서 포용정책만을 계속 주장하기는 어려운 문제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그런데도 그는 임기 말에 햇볕정책 구하기용 ‘10·4 대북 어음’을 끊어줬다.

하지만 지난 대선에서 햇볕정책은 국민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햇볕정책의 상징인 도라산역에서 공식 유세를 개시하며 통일경제 시대를 공약한 정동영 후보는 패배했다. 정권이 바뀌면 새 정부가 과거 정부의 정책 가운데 폐기, 계승, 발전 대상을 선택하는 건 당연하다. 빌 클린턴 미 행정부는 2000년 10월 북한과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했지만 부시 행정부는 이를 폐기했다. 하지만 클린턴이 이를 비난하는 걸 들어보지 못했다.

북의 변화를 끌어내지 못한 햇볕정책의 수명을 언제까지 연장할 것인가. 북은 지금 햇볕정책의 안락사를 재촉하고 있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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