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정찬주]모후산의 품에 안겨보니

  • 입력 2008년 11월 8일 03시 01분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온 지 8년이 됐다. 비로소 화순(和順) 사람이 다된 것 같다. 순박한 산중 마을 농부들과 스스럼없이 형님 동생 하며 친지처럼 지낸다. 보름 전부터 농부 네 분이 차례로 찾아와 올해 농사지은 쌀을 한두 말씩 주고 갔다. 화순 인심이 후하다는 증거다.

생각해 보면 최선의 결정이었던 것 같다. 여러 지인이 서울 부근의 시골에서 살기를 권유했지만 나는 사이비 낙향 같은 생각이 들어서 멀리 유배를 떠나듯 깊은 산중으로 내려와 버렸던 것이다. 처음에는 고립된 듯한 외로움으로 허허로웠으나 지금은 오히려 그 외로움이 나를 지탱해주는 힘임을 깨닫고 있다.

외로우니까 자연과 더 가까워졌다. 습지에 핀 물매화 꽃이 앙증맞고 야생차밭에서 딴 찻잎을 덖어 우린 차 한 잔이 내 동반자가 되었다. 혼자 차를 마시면서 찻잔을 하나 더 놓을 때가 있다. 그 찻잔은 마음으로 만나고 싶은 분의 것이다. 찻잔이 그분을 대신하므로 자리는 아취를 잃지 않는다.

모처럼 내 산방에서 멀리 나와 모후산(母后山)을 오른다. 손님이 오면 반드시 자랑하는 마음속의 청산이다. 공민왕이 피란 와 숨었던 해발 919m의 산이다. 모후산을 오를 때마다 느끼지만 초입에 들어서기만 해도 맑은 차 한 잔을 마신 것처럼 흐렸던 정신이 바로 선다. 자생하는 차꽃 향기가 풍긴다. 실제로 모후산 산자락의 동복에는 조선시대에 차를 만들어 조정에 보내던 다소(茶所)가 있었다.

산은 작년보다 더 매혹적이다. 군민의 힘으로 숲 가꾸기를 말끔하게 하여 잡목과 가시덤불이 사라진 대신 그 자리에는 산양삼과 고사리, 곰취, 더덕 등 산나물이 자라고, 오솔길은 조신한 여인의 가르마처럼 정갈하다. 산삼 씨를 뿌려 자란 삼을 산양삼이라고 부르는데, 그 시원지(始原地)가 바로 모후산 산자락이다. 정조 14년(1790년) 이만운의 아들 유준이 교열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동복현의 여자가 산에서 얻은 산삼을 밭에 심었고, 그 산삼 씨를 받아 최초로 번식시킨 사람이 최씨라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분명한 사실이다.

어머니 품처럼 그윽한 모후산의 매력에 반한 사람 중에는 군민을 대표하는 분도 있다. 나는 고작 내 산방을 찾은 손님과 동행하여 몇 번 산행했을 뿐인데 산골 주민들은 “군수님은 2년 동안 오십 번도 넘게 산을 오르내렸구먼요”라고 자랑한다. 그런 집념의 답사라면 모후산에서 무언가 군민의 활로를 여실하게 본 것도 같다. 문득 산골 촌로들의 말이 떠오른다. “작은 설악산이라고 해서 소설악이라고 한당께. 수려한 모후산에 외지 사람들이 자꾸 찾아와 번성하면 우리 화순도 잘사는 땅이 될 것이구먼.”

나는 흰 구름이 얹힌 모후산 정상 밑의 바위에 앉아 화순 땅의 음덕을 보는 한 사람으로서 촌로의 소망이 이루어지라고 합장해 본다. 거대한 빛기둥처럼 다섯 줄기로 뻗어가는 모후산 능선을 내려다보면서 내 여생의 터전이 된 농촌에 그래도 희망을 가져본다.

그래서인지 고찰 유마사 쪽으로 하산하는 발걸음은 한결 가볍고, 멀리 흐릿하게 보이지만 조개껍데기처럼 다닥다닥 붙은 농가들이 정겹다. 더욱이 모후산의 절경인 남면 유마사 산자락의 타오르는 단풍은 설악산 천불동의 그것 못지않고, 내 마음도 불이 붙은 듯 홀연히 격동되는 느낌이다. 저 만산홍엽(滿山紅葉)의 단풍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을 치열하게 사는 생명의 절정이 아닐 수 없다.

정찬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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