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성희]하버드대에서 온 메시지

  • 입력 2007년 2월 14일 19시 52분


최근 사상 첫 여성 총장을 맞이한 하버드대가 30년 만에 학부생의 교양교육 과정을 전면 개편한다고 한다. 과학, 종교와 세계 문화의 이해에 중점을 둔 개편안은 학생들이 다양한 가치와 관습, 제도와 접촉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1636년 청교도 목사 양성을 목적으로 세워진 하버드대는 그동안 실생활 문제보다는 자신들이 구축한 학문 세계에만 몰두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현재의 핵심 교양과목을 대체하는 8개 부문은 미학적 이해, 문화와 신앙, 경험적 추론, 윤리적 추론, 생활과학, 세계의 과학, 세계의 사회 그리고 세계 속의 미국이다. 다른 문화권에 대한 과목이 대폭 늘어난 것은 초강대국이면서도 테러 위협에 시달리는 미국이 다른 세계와 어떻게든 소통해 보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미학이 포함된 것은 세상은 선악이나 도덕률뿐 아니라 ‘아름다움’이란 틀로도 바라볼 수 있음을 보여 주려는 취지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학문 영역 간 벽을 허물고 연구 성과를 수용하면서 이를 개인적 삶의 문제로 끌어내린 시도다. 예컨대 ‘세계의 과학’에서 다뤄지는 화석연료 의존, 우주 탐사, 핵무기 확산, 기후 변화 등은 과학 이슈이긴 하지만 개인에게는 윤리적 선택을, 국가엔 정치적 결단을 요구하는 문제다.

개편안은 우리 대학들의 교양과목 구성이나 중고교 교과과정 개편에도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대학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교양 필수과목은 영어와 컴퓨터, 글쓰기나 체육이 거의 전부다. 기초학력이 부족한 학생이 너무 많아 자연계 신입생에게 기초수학이나 기초화학·물리를 교양 필수로 지정한 학교도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사정이 있겠지만 이런 과목들은 대학 생활과 학문에 필요한 수단 과목일 뿐 지식인이 되는 데 필요한 기본 교양과목이라고 하기 어렵다. 영국 작가 존 포이스의 말대로 “아무리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라 해도 지식과 생활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있는 한 교양인이라고 불릴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런 셈이다. 하버드대처럼 문과와 이과의 벽을 뛰어넘는 수준 높은 강좌는 꿈도 꾸기 어렵다. 전공의 벽이 높을뿐더러 교양과목은 대부분 경험이 부족한 시간강사의 몫이니까.

고교 때는 입시 준비로, 대학 때는 전공과목 공부와 취업 준비로 바쁘다 보니 우리 대학생들은 ‘진짜 교양’을 닦을 기회가 별로 없다. 이는 문제 해결 능력이 있는 창의적인 인재를 요구하는 우리 사회와 기업의 인재상(人材像)과도 거리가 멀다. 이기태 삼성전자 부회장은 “첨단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이과적 지식과 인문학적 교양을 기반으로 한 감성, 창의력, 상상력을 고루 갖춘 ‘통합형 인재’가 필요하다”며 이런 인재 부족이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2005년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사건’도 첨단지식에 어울리는 윤리의식을 갖추지 못한 한국 사회의 병리(病理)가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반대로 ‘컨버전스’가 화두인 디지털시대에는 인문학도도 기본적인 과학지식과 함께 기술 변화의 흐름을 이해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새내기들은 부푼 가슴을 안고 캠퍼스에 들어서는데 고교 ‘보충수업’에 불과한 낡은 교양과정으로 이들을 맞이한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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