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하일지/´老신사´ 미테랑의 추억

  • 입력 2002년 4월 19일 18시 26분


내가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을 면전에서 본 것은 1983년 10월 어느 날 프랑스의 한 지방 도시인 프아티에에서였다.

늦가을 햇살이 화사하게 내리비치는 낡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노신사 한 사람이 그의 수행원들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그를 환호하고 있었다. 길을 따라 즐비한 건물들의 베란다에도 하얗게 사람들이 나와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일일이 손을 흔들어 화답하면서 노신사 일행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고, 한 사람의 창백한 외국 유학생이었던 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서서 그를 볼 수 있었다. 그 노신사가 당시 프랑스 현직 대통령이었던 프랑수아 미테랑이었던 것이다.

▼˝역사적 도서관 세우겠소˝▼

미테랑은 참 좋은 얼굴을 한 사람이었다. 부드럽고 인자한 미소를 띤 그의 얼굴에는 어떤 신비한 빛이 감도는 것 같았다. 그를 보는 순간 정말이지 나는 알 수 없는 기쁨과 감동으로 가슴 벅차 오르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한 마디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고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런 강렬한 기쁨과 감동을 느끼게 한 사람을 나는 달리 만나본 적이 없다.

그 뒤 6년 동안 나는 그를 지켜보며 살았고, 그런 나에게 그는 수시로 감동을 주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잊혀지지 않는 것은 1987년 그가 재선에 성공한 직후 보인 태도였다.

선거 기간 동안 고향집에 내려가 조용히 선거 결과를 기다렸던 미테랑은 당선이 확정되자 엘리제궁에 재입성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파리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은 축제분위기에 들뜬 사회당 인사들과 수많은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 소란스러운 비행기 안 저 뒷자리에서 허름한 잠바차림을 한 미테랑은 조용히 혼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기자 한 사람이 다가가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묻자 그는 돋보기를 벗고 책표지를 보여주며 ‘프랑스 혁명사’라고 했다. 기자는 다시, 이제 또다시 대통령에 당선됐으니 앞으로 7년 동안 가장 하고 싶은 일 하나가 있다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미테랑은 전국의 모든 도서관을 하나로 연결하는 역사적인 도서관을 건립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소란스러운 비행기 안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던 그의 모습,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도서관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던 그의 그 엉뚱한 대답이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남게 되었다.

벌써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선 분위기에 들떠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색깔시비, 음해론, 보혁 논쟁이 전 국민을 흥분과 갈등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고, 언론마저 거기에 휘말려들고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물론 대선은 국가적 중대 사업이고 거기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냉정을 되찾아야 하는 까닭은, 그런 흥분된 분위기는 자칫 한 나라의 문화를 시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1980년대 민주화를 향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투쟁은 참으로 위대했다. 그러나 그 10년은 우리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손실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 시절 문학은 거칠기 짝이 없었고, 극장에 걸리는 영화들은 조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욕설과 정치구호를 외치는 것이 연극이었다. 정치 문제에 매달린 10년 동안 문화는 그렇게 시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불행한 10년이 없었다면 우리의 문학과 예술은 지금보다 훨씬 정교하고 세련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나는 떨쳐버릴 수 없다.

▼정치에 밀려 문화 시든다면▼

그 소란스러운 비행기 안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는 미테랑과 같이 우리 국민이 의연해질 수만 있다면 색깔시비나 음해론 같은 것은 이 땅에 번식할 수도 없을 것이고, 우리 국민도 기쁨과 감동을 주는 대통령을 갖게 될 것이다.

1994년 어느 날 파리의 생나자르 역 플랫폼에서는 중절모를 깊이 눌러 쓴 노신사 한 사람이 기차에서 내려 군중 속으로 총총히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14년 간의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며칠 전에 권좌에서 물러난 미테랑이었던 것이다. 수행원 하나 없이 총총히 혼자 사라져가고 있는 그의 모습에 대해 프랑스의 어느 신문은 ‘군중 속으로 사라지다’라는 제목의 짤막한 보도를 낸 바 있다. 이것이 내 추억 속에 있는 미테랑의 마지막 모습이다.

하일지 소설가·동덕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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