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영씨 자서전 출간]車경영 32년 "이제 말에서 내렸다"

  • 입력 2000년 11월 21일 19시 00분


“이제 나는 말에서 내렸다. 오래도록 같은 자리에 있으면 스스로의 오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법이다. 이제 말의 기사가 바뀌어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잘못을 고친다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그리 될 때 현대자동차는 더욱 훌륭한 준마로 커나갈 것이다.”

‘포니 정’ 정세영(鄭世永·72)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이 자동차 경영 32년을 정리한 자서전 ‘미래는 만드는 것이다’를 21일 펴냈다.

▽큰 형을 도우려 현대맨이 되다〓일기장을 토대로 펴낸 이 책에는 강원도 산골마을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큰 형인 정주영(鄭周永)전 현대 명예회장을 도와 한때 그룹 총수에까지 올랐던 정회장의 인생 역정이 담담히 담겼다.

특히 우리 고유의 자동차 모델인 포니 제작과 미국시장 진출 등 현대자동차를 세계적인 자동차회사로 키우기까지의 역동적인 뒷얘기들을 모두 5부로 나뉜 책 내용 중에서 2∼5부에 걸쳐 자세히 실었다.

책의 갈피갈피에는 큰형인 ‘왕회장’과의 형제애와 동지애, 회사 경영을 둘러싼 갈등이 숨어 있다. ‘왕회장’이 이광수의 동아일보 연재소설 ‘흙’의 한 구절에 자극받아 가출을 결심한 얘기, 미국 유학을 마치고 정치학 교수로 발령받았으나 ‘사업이나 같이 하자’는 ‘명령’으로 현대그룹에 발을 들여놓은 사연 등.

▽현대차를 떠날 때〓정 전명예회장은 조카이자 정씨 일가의 장자인 정몽구(鄭夢九·MK)현대기아차 회장의 사업과 관련해 왕회장과 몇 차례 마찰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70∼90년대 왕회장으로부터 MK의 현대차써비스에 애프터서비스(AS)부문과 자동차판매권 전주공장 등을 넘겨주라는 요청에 반발해 갈등을 빚었다고.

99년 3월 32년간 몸담은 현대차를 떠날 당시 왕회장이 “몽구가 장자인데 몽구에게 자동차를 넘겨주는 게 잘못됐어?”라는 바람에 사흘만에 아들인 정몽규(鄭夢奎) 당시 현대차 부회장과 함께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큰 형님이 떠나라는 거북한 말을 하기 전에 미리 떠났어야 했고 그러지 못한 게 죄송스러웠다”면서 “큰 형님의 속뜻을 진작 헤아리지 못한 내가 송구스러웠다”고 심경을 밝혔다.

▽정권과의 마찰〓80년대 초반 군사정권에 의해 현대자동차가 폐업 직전에 들어갔던 사실도 털어놓았다. 또 91년 왕회장이 정치판에 뛰어들자 정부로부터 탄압이 시작됐다는 것.

“내가 그룹 회장이 된 뒤 노태우(盧泰愚)정권은 무지막지한 세무사찰로 1300억원을 추징해갔다. 청와대 신축공사 때도 온갖 요구로 당초 예산의 2배인 450억원이나 들어갔는데 추가공사비를 못 준다고 해서 소송을 냈지만 이 또한 김영삼(金泳三)정부 때 압력에 의해 취하했다. 이를 두고 우리는 지금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청와대의 반(半)은 현대 것’이라는 소리를 한다.”94년 3월 김영삼 대통령과 가까운 지인을 만났는데 그로부터 “정주영 회장이 현대에서 완전히 퇴진하면 현대의 18가지 현안을 바로 다음날로 해제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는 것. 정권이 경제계를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 불쾌했다고 털어놓았다.

<신연수기자>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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