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명옥의 세상읽기]진짜 버려야 할 것들

  • 입력 1997년 1월 10일 20시 24분


지난해 말 시댁이 이사를 했다. 십오년이 넘게 사셨던 아파트에서 이사를 하시니 짐 정리가 오죽했으랴. 난 그저 바쁘다는 핑계로 제때 도와드리지는 못했지만 그 전에 어머님과 나눴던 얘기가 생각났다. 시댁에 가보면 부엌에서부터 방마다 『이것도 좀 버리세요. 저건 왜 안버리세요』하면서 한두마디씩 하게 되는 물건들이 눈에 띄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 자신도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신혼여행 가서 입으라고 친정 어머니가 사주셨던 홈드레스가 바로 그것이다. 굳이 홈드레스라고 부르는건 진짜 집이 아니면, 그것도 식구들 앞이 아니면 절대로 입을 수 없는, 그때 내 눈에는 촌스럽기 그지 없는 옷이었기 때문이다. 마흔 하나에 날 낳으셔서 막내딸 시집 보낼 때 60이 훨씬 넘으셨던 친정 어머니. 그래도 홈드레스라고 당신 눈에 드신 옷을 시장에서 한벌 사셨던 것이다. 그 마음을 뿌리칠 수 없어서 신혼때 딱 한번 입어봤던 그 옷을 난 아직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시어머님이 이것저것 남들 눈에는 다 버릴 것으로 보이는 물건도 싸 안고 계신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양 손잡이가 다 떨어져나간 냄비. 칠도 죄다 벗겨졌는데 새 거 하나 사시지, 아니 그냥 하나 사다드리면 버리실까 했다가도 그게 아니었다. 『얘, 오래 살다보니까 물건마다 사연이 있고 정이 붙어. 저건 너희 아버님 회사창립 기념일에 타온거라 못 버리고, 저 냄비에다 음식 푸짐하게 해서 집들이 했는데 그래서 그냥 두고 그런다』 마음이 여리고 정이 많으신 어머님 말씀이 이제야 와 닿는다. 『그래요, 어머니. 저도 그래서 못버리는게 있더라구요』 그랬더니 어머님이 살짝 웃으시면서 『이제 너도 나이가 좀 드는구나』하셨다. 그래, 이제야 나도 세상 사는 맛을 이렇게 알아가는건가. 사연이 쌓여서, 정이 아쉬워서 값 나가는 게 아니라도 그저 이게 내 것이지 싶은 마음에 오히려 감사하고 싶어진다. 냉장고가 좀 작으면 어떠랴. 세탁기가 반자동이거나 혹은 수동이라서 옆에 딸린 탈수통으로 옮기는게 좀 수고스러운들 어떠랴. 아직 싱싱 잘 돌아가서 제 일 잘 하고 있으면 그게 다 같이 살아가는 재미인걸. 『얘야, 버릴 것만 버렸는데도 10만원이 넘게 들었다』하시는 어머님 말씀처럼 이젠 쓰레기버리는 것도 돈이다. 그럴바에야 이왕이면 돈들이지 않고 버릴 수 있는 마음속의 미움과 오해, 이런것들을 치우면서 연초에 대청소 한번 해야겠다. 차 명 옥<방송작가> ======================================== 약력 △59년 출생 △이화여대 졸업 △주부생활 기자 △현 방송작가 △저서 「엄마, 여자로 살기 왜 이렇게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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