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유재동]“기관장 공모, 다 그런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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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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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동 경제부 기자
유재동 경제부 기자
8월 말 동아일보 취재팀은 한 공공기관 임원추천위원회(임추위)의 정부 측 위원으로 참여한 A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파행으로 치닫는 ‘공공기관장 공모제’ 사례들을 취재한 뒤 그에 대한 정부 측 반론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 공공기관은 임추위가 올린 기관장 후보를 모두 떨어뜨리고 ‘낙하산 후보’를 억지로 선임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과거 취재 경험상 당연히 “우린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기관장을 뽑았다” “낙하산은 근거 없는 얘기다”와 같은 반응을 예상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과 많이 달랐다.

“공기업이란 게 옛날부터 다 그런 거 아닙니까? 말이 공모지, 공모한다고 해서 제대로 된 것이 있습니까? 다 위에서 떨어져 내려왔죠.” 자신도 이런 현실이 못마땅하다는 투의 자조(自嘲)적 답변으로 이해하긴 했다. 그래도 “다 알면서 왜 묻느냐”는 반응에 묻는 사람이 무안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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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산’ 당사자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기관장 공모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취재팀은 사전에 기관장으로 내정됐다는 의혹이 불거진 한 후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낙하산 논란을 해명하려는 듯 본인 경력에 대한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놨다. 그의 마지막 말이 걸작이었다. “이렇게 나름대로 전문성이 있으니까 위에서도 날 뽑아준 것 아니겠습니까?” 공모가 끝나기도 전에 자신이 내정됐다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공개한 것이다.

기관장 공모제를 취재하면서 이 제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많은 편법과 조작, 눈가림의 기막힌 사례들을 접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이런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굳어져 내려온 악습(惡習)이라 마치 그게 당연한 절차요, 대수롭지 않은 현실인 것으로 착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상당수 공무원은 “아, 그거요? 그런데 왜 지금 갑자기…” 하는 태도로 취재에 응했다.

공모제의 파행은 이미 세 정부에 걸쳐 이어졌다. 어느 정부도 제대로 수술하지 못한 채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다. 현 정부도 정권 초기엔 ‘공기업 개혁’을 주된 화두로 꼽았지만 후반기로 갈수록 의지가 후퇴해 더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결국 ‘다음 권력’인 정치권이 이 문제를 푸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치권의 태도는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새누리당 측은 “대안이 있다면 당연히 공약으로 제시하겠지만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공모제를 손대기는 어렵다”는 반응이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사실 누가 집권하더라도 선거캠프의 ‘식구’들을 취직시키는 데 공공기관만큼 좋은 곳도 없다”고 털어놨다.

기관장 공모제는 당초 투명인사, 책임경영이란 그럴듯한 취지로 출발했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한 채 지금은 가장 위선적인 ‘대(對)국민 사기극’으로 전락했다. 기관장을 정하는 사람과 내정된 사람, 그걸 알면서 열심히 제대로 된 사람을 ‘뽑는 척’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한 편의 코미디다. 그걸 모르는 순진한 들러리 후보와 관객만 골탕을 먹는다.

공모제는 한국이 왜 아직 선진국이 아닌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13년째 이어지는 이 파행적 제도는 당장 없애든가, 대폭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은 이렇게 입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정부나 정치권이 그 이유를 더 잘 안다.

유재동 경제부 기자 jarrett@donga.com
#기관장 공모#기자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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