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손택균의 카덴차>2010내 맘대로 BEST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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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2월 16일 17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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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

이달 초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올해 1~11월 국내 개봉 영화 편수다. 12월 개봉 영화를 합치면 400편쯤 될까. 새삼 따져보니 참, 숨 가쁘게 봤구나 싶다.

관계자 설문 등을 통한 2010년 영화계 또는 시장 결산 기사가 하나둘 나오고 있다. 영화산업 관계자가 아닌 독자에게 어느 정도의 효용이 있을지 의문이다. 엊저녁 음반회사에서 일하는 후배와 조촐하게 한잔 하다가 이런 얘기가 나왔다. "대중문화시장에는 개인의 취향을 차별화하고 싶은 욕구와 집단의 취향으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싶지 않은 욕구가 공존하고 있는 것 같다."

예전 글에서 '영화를 상품으로 본다'고 썼다. 예술이고 싶어하는, 예술 또는 그 비슷한 언저리의 어떤 것이 개입해 생산된, 상품. 하지만 어쨌거나 근본부터 시장에서의 승부를 염두에 둔 콘텐츠이기에, 어떤 한 영화의 좋고 싫음('나쁨'이 아닌 '싫음')을 가늠하는 취향의 잣대는 그 영화를 관람한 사람 수만큼 많을 수밖에 없다. 가급적 취향을 배제하고 한 발짝 물러난 시선으로 좋은 영화와 좋지 못한 영화를 나눠야 한다면, 그 기준은 아마 그것을 만든 사람의 '솜씨', 즉 천부적 재능의 차이에 대한 평가밖에 없으리라는 것이 솔직한 생각이다. 노력으로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재능의 차이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영역.

서론이 살짝 삼천포로 빠져버렸지만, 2010년 국내 개봉 영화들을 한 번 죽 다시 훑어 정리하는 글을 써보려는 마당에, 영화에 대한 어떤 가치판단의 의도도 갖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밝혀두고 싶다. 내게 그럴 자격이나 안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래에 언급할 영화들은 그냥 전적으로 개인 취향에 따라 골라낸, 친한 사람들에게 '혹시 안 봤으면 짬날 때 꼭 한번 챙겨 보라'고 권하고 싶은 영화일 뿐이다. 참고로 최근 몇 년 간의 베스트로 내가 꼽는 작품은 '다크 나이트'와 '슬럼독 밀리어네어'다. 이 두 영화가 마뜩찮았던 분이라면 이쯤에서 이 글은 그만 읽기 바란다.

3D 보여주기에 몰두하다가 이야기를 잃어버린 영화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쏟아진 한해. ‘토이 스토리 3’는 잘 숙성된 캐릭터와 이야기가 어떻게 하면 3D 기술과 행복하게 만나서 ‘입체적인 감동’을 전해줄 수 있는지 보여준 모범적 사례다.

사진 제공 SPBV코리아
3D 보여주기에 몰두하다가 이야기를 잃어버린 영화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쏟아진 한해. ‘토이 스토리 3’는 잘 숙성된 캐릭터와 이야기가 어떻게 하면 3D 기술과 행복하게 만나서 ‘입체적인 감동’을 전해줄 수 있는지 보여준 모범적 사례다. 사진 제공 SPBV코리아

① 토이 스토리 3
: 8월 5일 개봉. 관객 146만1194명(28위)

"꼭 보세요. 꼭."
여름 내내 '요즘 볼만한 거 뭐 있냐'는 주변의 질문에 거의 노래하다시피 권했던 영화다.

1, 2편은 흥미로웠지만 마음에 쿵 와 닿는 게 별로 없었다. 개별 작품으로서보다는 셀(cells) 애니메이션 시대에서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 시대로 넘어가는 이정표로서의 기억이 더 크다. 그래서 뜬금없이 우디와 버즈가 11년 만에 돌아온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내심 '에이 톰 (행크스) 아저씨도 참 주책이시네. 이 거지같은 3차원 입체영화 열풍에 결국 못 참고 한몫 끼시다니. 폼 안 난다' 싶었다.

그런 마뜩찮은 마음으로 시사회장에 들어가 앉았다가, 오 이런 OO…. 자꾸 눈물이 쏟아져서, 꼴딱꼴딱 목으로 넘기면서 참아내느라 아주 혼쭐이 났다. 얼굴에 뒤집어쓴 3D 고글이 다행히 가림막 역할을 해줬다. 집에서 혼자 TV로 봤거나 사람 없는 극장 뒤편에 앉아 봤다면 눈이 퉁퉁 부었을 거다.

1편에서 여섯 살이었던 장난감들의 주인 앤디는 이제 17세의 고교졸업반 청년. 앤디가 갓난아기 때 만난 카우보이 장난감 우디와의 이별 이야기가 3편의 내용이다. 그 이별은 장난감과 주인뿐 아니라 연인이나 친구와의 헤어짐, 가족과의 작별, 또는 어떤 한 사람이 하나의 시기에 건네는 고별인사 등 여러 상황에 잇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읽어낼 수 있다.

3D 이미지에 몰두한 나머지 '이야기'를 만드는 데 정말 최소한의 정성조차 들이지 않는 파렴치 영화가 갈수록 난무하는 판국에 정말 모처럼 만난 고마운 수작이었다. 과하지 않게 적절히 매끈한 3D 영상, 아기자기하면서도 따뜻하고 뭉클한 이야기의 즐거움이 치우침이나 부족함 없이 고루 풍성하다. '역시 픽사. 과연 고수답다' 싶었다.

인터넷 리뷰 사이트 로튼토마토닷컴(rottentomatoes.com) 평점은 16일 현재 99%(100% 만점). "코미디, 모험, 진솔한 감동을 솜씨 좋게 버무린, 보기 드문 수작 속편(Deftly blending comedy, adventure, and honest emotion, a rare second sequel that really works)"이라는 코멘트. 전적으로 동감이다.

‘인 디 에어’의 비주얼 요소는 주연 조지 클루니. 줄곧 수수한 수트 차림을 유지하는 그는 역시 옷보다 옷걸이가 중요한 것임을 몇몇 장면에서 문득문득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사진 제공 래핑보아
‘인 디 에어’의 비주얼 요소는 주연 조지 클루니. 줄곧 수수한 수트 차림을 유지하는 그는 역시 옷보다 옷걸이가 중요한 것임을 몇몇 장면에서 문득문득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사진 제공 래핑보아

② 인 디 에어 (Up In The Air)
: 3월 11일 개봉. 관객 5만2573명(165위)

글을 쓰기 위해 순위를 확인하다 깜짝 놀랐다.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관객이 안 들었을 줄이야. 정말…. 여러 가지로 참담한 생각이 든다. '수작 소품 드라마는 극장에서 안 보고 다운받아서 컴퓨터로 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관객'이 늘어난 현상의 폐해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 아닐까. 갈수록 좋은 영화, 감동적인 영화를 만나기 어려워지는 것. 전적으로 관객 책임이다. (갑자기 화가 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흠.

'해고 통보 대행업자'라는 특이한 직업을 가진 사내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조지 클루니가 연기했기 때문에 영화를 본 뒤에도 절대로 이름이 생각나지 않고 그냥 '조지 클루니'로 기억되는 주인공 '라이언 빙햄'은 "오늘부로 회사를 나가줘야겠다"는 통보를 회사 대신 전해 주고 다니는 이상한 분야의 전문가다. 미국 전역, 때로는 해외파견 근무 중인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당신, 짤렸어요"라는 요지의 말을 '해고대상자가 최대한 충격 받지 않을 방법을 통해' 전해준다. 그러다 보니 업무특성상 한 해 평균 322일을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서(Up In The Air) 지낸다는 것.

해고 대상자의 충격을 최소화하는 그의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 '고객'은 그와 마주 앉는 피고용인들이 아니라 해고의 주체인 회사들이다. 빙햄은 트러블 없이 조용하게 해고 과정을 마무리하는, 누구보다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전문 킬러인 셈이다. 게임을 즐기듯 해고 기술을 발휘하며 항공사 마일리지 적립에 몰두하는 주인공을 만약 클루니 아닌 다른 배우가 연기했다면 밉살스러워서 끝까지 봐주기 어려웠을 거다.

연출을 맡은 제이슨 라이트먼은 3년 전 '주노'에서 자신을 임신시킨(그랬다기보다는, 임신시키도록 자진해서 적극적으로 이끈…) 남자친구를 강한 척 쿨한 척 외면하는 여고생 이야기를 재미나고 사랑스럽게 그린 바 있다. 빙햄도 주노처럼 재수 없는 사람인 척, 냉정한 사람인 척 애쓰는, 근본 선한 캐릭터다. 무심함과 냉정함으로 여린 속내를 포장해 일상을 버텨내는 고독하고 가여운 도시인. 요즘 이상스럽게 유행하는 '차도남녀'들이 귀감으로 삼을 만한, 겉멋을 뛰어넘은 하나의 완성된 속 깊음의 경지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토마토 평점은 90%.

‘킥 애스’을 특별하게 만든 캐릭터는 얼치기 히어로인 주인공 킥 애스(왼쪽)가 아니라 보랏빛 하드고어 액션히로인 ‘힛 걸’이었다. 힛 걸을 연기한 배우 클로이 모레츠는 올해 ‘렛미인’ 할리우드 리메이크작에서 훌쩍 커버린 자태를 보여줬다. 영화가 원작에 못 미쳐 아쉬웠지만.
사진 제공 필름마케팅캠프
‘킥 애스’을 특별하게 만든 캐릭터는 얼치기 히어로인 주인공 킥 애스(왼쪽)가 아니라 보랏빛 하드고어 액션히로인 ‘힛 걸’이었다. 힛 걸을 연기한 배우 클로이 모레츠는 올해 ‘렛미인’ 할리우드 리메이크작에서 훌쩍 커버린 자태를 보여줬다. 영화가 원작에 못 미쳐 아쉬웠지만. 사진 제공 필름마케팅캠프

③ 킥 애스: 영웅의 탄생
: 4월 22일 개봉. 관객 15만1400명(112위)

2008년의 '원티드'를 연상시켰던 의외의 복병 괴작(怪作).
음식으로 비한다면 정말 최선을 다해 정성껏 만든… 콜라, 랄까.

제목 그대로 기존 슈퍼히어로 영화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는(Kick-Ass)' 영화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코스튬을 차려입고 거리에 나선 고등학생이 주인공. 그는 첫날부터 좀도둑과의 대결에서 죽도록 얻어맞은 뒤 온몸에 철심을 박는 대수술 끝에 '튼튼한 몸'을 얻는다. 그 뒤부터 '맷집'을 주무기 삼아 악당들에게 무식하게 들이댄다.

CG 덕에 진짜로 하늘을 날아다니고 슈퍼카를 몰고 거미줄을 발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을 죽 줄 세워 놓고 한마디로 '뻥치시네!'라며 통쾌한 조롱을 한 방씩 먹이는 듯한 이야기다.

주인공은 얼빵한 킥 애스지만, 영화가 분출하는 매력의 절반은 보랏빛 가면과 코스튬을 조막만한 얼굴과 가녀린 몸에 휘감은 조연 '히트 걸' 민디 역의 클로에 모레츠로부터 나온다. 시사가 끝나고 한 타지 선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 저 가슴이 콩닥거리는데…. 설마 변태인 걸까요. ㅠㅠ"

토끼 같은 자녀를 둔 40대 가장인 선배의 답변이 나를 안심시켰다.
"아냐…. 나도 설레. 미치겠어."

처음에는 낯설지만 거듭 돌려 볼수록 담백한 맛이 느껴지는 영화. ‘500일의 썸머’는 1990년대를 정점으로 슬그머니 퇴화해버린 듯한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등장한 묘한 별종이다. 유쾌함과 씁쓸함의 혼재. 얄팍한 듯 두텁다.
사진 제공 이가영화사
처음에는 낯설지만 거듭 돌려 볼수록 담백한 맛이 느껴지는 영화. ‘500일의 썸머’는 1990년대를 정점으로 슬그머니 퇴화해버린 듯한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등장한 묘한 별종이다. 유쾌함과 씁쓸함의 혼재. 얄팍한 듯 두텁다. 사진 제공 이가영화사

④ 500일의 썸머
: 1월 21일 개봉. 관객 13만8222명(117위)

솔직히 언론시사 때는 잠깐 졸았다. 그런데 최근 케이블TV에서 해주는 걸 중간쯤부터 넋 놓고 앉아서 보다가, 야 이게 이렇게나 풍성하고 담백하고 '어른스러운' 영화였구나, 새삼 느꼈다.

주인공 톰은 건축가의 꿈을 포기하고 변변찮은 글재주에 기대어 축하카드 카피라이터 일로 대충대충 먹고 사는 남자. "매일 부서지는 건물을 짓느니 평생 기억에 남을 글을 쓰자고 생각했다"는 멋들어진 대사는 비겁하고 게으른 자위적 가식일 뿐이다. 자신의 인생에 솔직하지 못한 남자의 연애가 마음먹은 대로 술술 풀릴 리 만무하다. 운명적 사랑을 낭만적으로 꿈꾸다가 한 별난 여인을 만나 사랑하는 방법,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호되게 깨우치게 된 어떤 애어른의 성장담이다.

MP3플레이어의 셔플 모드처럼 엮어내는 구성 방식이 거듭 볼수록 흥미롭다. 31일째는 복사기 앞에서 느닷없이 키스를 당하고, 34일째는 예비부부처럼 가구점 쇼핑을 한 뒤 집에서 첫 섹스를 하고, 87일째는 포르노 비디오를 함께 본 뒤 샤워실에서 복습을 해보고…. 그래도 "애인이 아닌 친구 사이"라고 하던 여자는 290일째에 힘들다며 헤어지자 느닷없이 통보해 오고. 일련의 사건들이 시간 순이 아닌 무작위 모드로 리플레이 된다. 연애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이 그렇듯이.

2주 전쯤 랩에 싸서 냉동실에 넣어 둔 남은 밥처럼 돼버린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신선하게 부활시킬 매력적인 레시피를 제시해준 영화라 생각한다.

이리도 밋밋할 수가. ‘인빅터스’는 21세기 영화답지 않게 드라마의 정공법만 고수한다. 골인지점은 뻔한 감동. 그런데 그 뻔한 감동의 무게가 너무 둔중해 도무지 밋밋하다 트집 잡을 방도가 없다. 잡스런 기교를 한 방에 날려버리는 내공을 보유한 강호의 절대고수, 클린트 이스트우드.
사진 제공 올댓시네마
이리도 밋밋할 수가. ‘인빅터스’는 21세기 영화답지 않게 드라마의 정공법만 고수한다. 골인지점은 뻔한 감동. 그런데 그 뻔한 감동의 무게가 너무 둔중해 도무지 밋밋하다 트집 잡을 방도가 없다. 잡스런 기교를 한 방에 날려버리는 내공을 보유한 강호의 절대고수, 클린트 이스트우드. 사진 제공 올댓시네마

⑤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
: 3월 4일 개봉. 관객 10만47494명(138위)

인생 별것 있나 하는 말처럼, 나는 '영화 별것 있나' 생각한다.

2시간이 지나고 상영관을 빠져나올 때 어쩐지 가슴이 벅차오르고 머릿속을 청소한 듯 기분이 말끔해지면, 그게 좋은 영화 아닐까. '인빅터스'는 포스터만 척 봐도 '바르게 살자 선동영화'인 게 뻔하다. 그런데 그 뻔한 뚝심이 너무 좋아서, 고마울 지경이었다.

1995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자국에서 개최한 럭비월드컵을 통해 인종 간 화합의 계기를 마련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 백인의 탄압에 저항해 27년간 투옥됐다가 천신만고 끝에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모건 프리먼)가 흑백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백인 스포츠'인 럭비를 지원하는 승부수를 던지며 '관용의 정치'를 설파한다.

이런 이야기를 닭살 안 돋게 멋지게 만들 수 있는 사람. 클린트 이스트우드 말고 누가 있을까. 올해 80세가 된 그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밖에…
○소셜 네트워크
○시라노; 연애조작단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사랑은 너무 복잡해
○페어 러브
등이 내게는 참 보는 재미 쏠쏠했던 올해의 영화들이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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