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호의 메디컬&로]법의학은 死因의 배경도 밝혀야

  • 입력 2001년 2월 6일 18시 40분


마을 뒷산에 약수를 뜨러간 김기출씨(45)는 숨이 멎는 듯 했다. 아랫도리는 벗겨지고 얼굴과 손은 상처투성이인 40대 여자의 시체였다. 동네 사람에 따르면 이 여자는 산나물을 캐러 자주 산에 다닌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피해자가 성추행을 당한 뒤 살해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부검결과는 달랐다. 벗겨진 아랫도리에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얼굴과 손의 상처도 넓게 퍼져 있었지만 깊지 않았다. 무엇인가에 쓸린 듯한 형태였다. 갈비뼈가 부러진 모양으로 미뤄 트럭이 뒤에서 받은 것으로 추정됐다.

경찰과 함께 시체가 발견된 현장으로 가보니 예상대로 차길에서 가까왔다. 피해자는 트럭에 오른쪽 등을 받혀 갈비뼈가 부러졌고 차길 옆에 돌이 섞인 풀숲으로 나뒹굴어 얼굴과 손등에 상처가 난 듯했다. 범인은 여자를 산쪽으로 5m 가량 옮긴 뒤 성폭행으로 꾸미기 위해 아랫도리를 벗긴 것 같다고 경찰에게 일러줬다.

사건은 쉽게 풀렸다. 피해자와 같은 동네에 사는 용의자를 붙잡아 법의학적 단서를 근거로 추궁하자 자백한 것이다. 트럭을 몰고 좁은 차길을 과속으로 달리다 피해자를 발견하고 급제동했지만 사고를 피할 수 없었다.

법의학은 부검을 통해 사인만 밝히는 학문이 아니다. 사인과 무관하게 여겨지는 다양한 사실을 경찰의 수사 내용 및 사건 현장과 종합해 ‘사건과 죽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일어났는지 근거를 제시하거나 밝히는 학문’이다.

법의학자가 “이 사람은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폐를 찔러 숨졌다”는 말로 할 일을 다한 듯이 마무리했다면 이 사건은 미궁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02―590―1156

강신몽(가톨릭의대 법의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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