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77>

  • 입력 2009년 4월 22일 13시 40분


결코 습관이 되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사랑도 그 중 하나다. 습관이 된 사랑은 추하다. 사랑이 아니다.

40분이 지났다.

그 사이 민선은 울음을 그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보르헤스와 세렝게티도 간식을 사온다는 핑계를 댄 후 연구실을 벗어났다. 볼테르는 느릿느릿 수술실로 갔다.

사라는 깨어나지 않은 듯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20분이나 남았다. 볼테르는 사라 곁에 앉았다.

"사라!"

'서트'가 아니라, '서사라 트레이너'가 아니라 '사라'였다.

볼테르는 자신을 향한 사라의 마음을 진작부터 눈치 챘다. 그렇지만 글라슈트가 '배틀원'에서 우승할 때까지 모든 것을 미뤘다. 취미도 없었고 휴식도 없었다. 여자와의 사랑은 사치였다. 최고 속도로 삶의 터널을 혼자 내달리기에도 벅찼다. 그가 외면할 때마다 사라는 더 오래 스파링을 뛰고 더 높은 언덕을 오르고 더 자주 글라슈트와 접속했다.

"미치겠군!"

볼테르는 양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벼댔다. 민선의 주장이 옳았다. 격투 로봇 개발에만 매진한 그가 거금을 마련하긴 어려웠다. 그렇지만 글라슈트를 <보노보> 사장 찰스에게 넘길 수는 없다. 글라슈트는 그 누구에게도 팔지 않을 것이다. 가족이니까!

"그래, 가족은 사고팔지 않아. 응?"

볼테르가 시선을 내렸다. 차디찬 기계 팔이 볼테르의 손목을 가볍게 쳤다. 아직 사라가 깨어날 시간이 아니다. 17분 30초나 남았다.

"서 트레이너 혹시……? 맞지? 돌핀이 투여되지 않은 거지?"

볼테르가 급히 사라의 왼 어깨에서 패치를 떼고 살점을 집어 당겼다. 엷은 막이 끈적끈적한 밀가루 반죽처럼 뜯겨 나왔다. 항상 같은 자리에 패치를 붙이는 버릇을 미리 알고 약효를 차단하는 인공 피부를 덧댄 것이다.

"미쳤어? 그 끔찍한 고통을…… 신음도 없이? 대답해. 이번이 처음 아니지?"

볼테르는 올해 들어서만도 세 차례 큰 수술을 했다. 그때마다 사라의 왼 어깨에 패치를 붙였다. 깊은 마취에 빠졌으리라 확신하고 여기를 자르고 저기를 죄고 거기를 돌려 끼웠다. 완전히 기계인 자리엔 고통이 덜하겠지만 기계몸과 천연몸이 맞닿는 부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아팠으리라.

"……지난번보단 훨씬 나았어요. 덕분에 90퍼센트를 넘진 않았죠? 특별시 최고 솜씨잖아요?"

"사라!"

볼테르는 사라를 끌어안으려다가 멈췄다. 수술을 끝낸 직후엔 사소한 충격도 큰 고통을 낳는다. 사라가 볼테르의 걱정하는 마음을 헤아린 듯 먼저 팔을 잡아당겼다. 볼테르가 끌려가지 않고 버텼다.

"쉬어야 해.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한숨 자. 고통이 심하면 약이라도……."

사라는 팔을 놓지 않았다.

"이 몸이 차가워 싫은……건가요?"

사라의 기계몸은 겨우 28도에 머물렀다. 수술을 위해 기계몸을 24도까지 떨어뜨렸던 것이다. 기계몸의 전도도가 워낙 좋은 탓에 28도도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몸 전체가 36.5도에 이르려면 한 시간은 더 필요했다.

"아니야, 그런 거."

"그럼 거의 90퍼센트 가까이 기계몸이라서?"

"괜한 소리!"

"괜한 소리! 듣기 좋네. 이렇게 반말 해주길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요?"

"그랬……나, 내가?"

처음에는 돌핀이 투여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 반말이 튀어나왔고, 그 다음엔 사라의 적극적인 구애에 당황한 탓이다. 사라가 검은 손을 들어 가까이 오라 흔들었다. 볼테르가 엉덩이를 들고 사라의 입술 위에 귀를 갖다 댔다.

"얼굴 좀 펴요. 찡그린 거 싫어…… 글라슈트 시스템 복구를 위한 그 돈…… 내가 구했어요."

"사라! 무슨 돈이 있다고……."

"……비밀! 나쁜 돈 아니니까 걱정 마요. 내 돈이야. 서사라의 돈!"

"사라!"

"상 받고 싶은데, 한 번만 안아줄래요. 추워요. 견딜 수 없이……."

볼테르가 조심조심 침상으로 올라갔다. 사라의 88퍼센트 기계몸과 12퍼센트 천연몸을 껴안았다. 사라가 속삭였다.

"……키스해 줘요."

볼테르가 그녀의 검은 이마를 볼을 입술을 훔쳤다. 사라의 양손이 그의 등을 감쌌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두 다리를 열 십 자로 엮어 죄었다.

"아, 따뜻해!"

어떤 사랑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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