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421…1944년 3월3일(9)

  • 입력 2003년 9월 21일 17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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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통을 벗어 던진 청년이 영남루 돌계단을 토끼뜀으로 뛰어 올랐다가 내려오고, 또다시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랑뿐이었다. 나른한 봄바람은 수심에 찬 손길로 아랑의 거뭇거뭇한 머리칼을 빗어내리고, 매화와 복숭아꽃 향은 하얀 치마를 풍성하게 부풀렸다. 청년은 아기를 업고 있는 것처럼 두 손을 뒷짐지고 깡충깡충 아랑 앞을 지나갔다. 저고리 고름이 청년의 볼을 쓰다듬고, 치맛 자락이 어깨를 스쳤다. 아랑은 청년의 이름을 부르려고, 원래 이름으로 부를까, 새로 지은 이름으로 부를까 잠시 망설이다, 이춘식, 이라 불렀다. 청년은 돌아보지 않았다. 자기 심장과 숨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파아파아파아파아, 아이고 숨차라! 몸 속에서 심장이 사방팔방으로 튀어나갈 것 같았다. 파아파아파아, 열 덩어리다, 더 이상 뜨거워지면, 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 형, 어디 있는 거야? 형이 있었으면, 파아파아, 아니지, 날 진정으로 몰아세우고 격려할 수 있는 것은 내 자신뿐이다, 파아파아파아, 내 목소리는 내 귀로 들을 수밖에 없고, 내 마음에 중압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은 나, 파아파아, 나뿐이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와 투쟁하면서, 필연적으로 단결하여 계급을 이루고…혁명을 거치면서 지배계급이 되고, 지배 계급으로 구태의연한 생산 관계를 폭력으로 폐기한다. 우근은 영남루 계단에 걸터앉아 무릎을 꽉 진 두 손을 버팀목 삼아 윗몸을 폈다. 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 숨을 토하기만 하면 안 되지, 들이쉬고, 큐우 파아파아파아, 더 크게, 큐우파아, 그렇지, 규칙적으로, 큐우파아, 천천히, 큐우, 파아, 큐우, 심장이 어느 정도 진정됐다, 큐우, 파아, 큐우, 1분 정도만 더 쉬었다가 다시 뛰자, 슬슬 돌아가 옷을 갈아입어야지 안 그러면 기차 시간에 늦겠다. 진정한 자유, 개인의 재능과 능력의 전면적인 발휘는 공산주의 하에서만 가능하다. 큐우, 파아, 큐우, 파아, 큐우, 파아, 큐우, 파아.

청년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가 아랑의 얼굴 앞을 스쳤다. 아랑은 눈길을 돌렸다. 땅으로는 땀이 뚝뚝 떨어지는데, 땀 냄새는 아니다. 피. 청년의 오른 다리가 빨갛게 젖어 있다. 아이고, 이럴 수가! 아랑은 시들어 가는 꽃처럼 고개를 떨어뜨리고, 한탄을 눌러 담은 두 눈으로 탄흔을 보았다. 막을 수 없다, 아무 것도 막을 수 없다, 그 소녀가 일본 사람에게 끌려가는 것도 막을 수 없었고, 이 청년의 몸에서 흐르는 피도 막을 수 없다, 아이고, 나는 한탄하는 것밖에 할 수 없다니, 이것밖에 안 되다니!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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