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소비자 파워]소비자 피해구제 제도

  • 입력 2000년 2월 7일 19시 57분


▼독일▼

독일 최대 규모의 컴퓨터 전자제품 판매업체인 포비스(Vobis)사는 99년 2월 ‘덴크제텔(Denkzettel)’이라는 광고전단 맨 앞쪽 전면에 신형 IBM 컴퓨터 광고를 실었다. 야심만만하게 마련한 ‘전략상품’이었다. 포비스는 광고의 컴퓨터 사진 밑에 가격을 ‘849?’로 표시했다. 그 밑에 조그만 글씨로 ‘1660.50 DM’이라는 독일 마르크화 가격을 덧붙였다.

그밖에 다른 면의 제품 가격은 모두 ‘DM’으로 표시했다. 당시 1유로화는 1.96마르크. 유로화 표시 가격은 마르크 표시 가격에 비해 단위가 낮아 싼 것처럼 보일 가능성이 당연히 높다. 포비스는 바로 이 점을 노렸던 것. 소비자 입장에서는 조그맣게 쓰인 화폐 단위를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이 IBM 컴퓨터가 실제 가격보다 절반 가까이 싼 것처럼 착각할 수 있는 것이다.

독일 소비자보호협회는 이같은 광고가 소비자에 대한 기망행위에 해당된다고 판단하고 포비스측에 광고 중단을 요구했으나 포비스는 거부했다.

우리의 경우라면 소비자단체가 시위나 불매운동 등 실력행사를 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소비자도 이 광고로 인해 직접 피해를 본 경우에 한해 업체를 상대로 소송을 내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는 다르다. 독일에서는 소비자 피해에 대한 사전예방 또는 구제책으로 소비자단체가 소비자를 대표해 직접 소송을 수행할 수 있는 ‘단체소송’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보호협회는 포비스 본사가 있는 아헨지방법원에 광고금지를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아헨지법은 소비자보호협회의 주장을 받아들여 소비자를 현혹하는 광고를 금지하도록 명령하고 이에 따르지 않을 경우 최고 50만마르크(약 3억1500만원)의 벌금을 내도록 했다. 포비스는 판결 직후 이 광고를 삭제했다.

협회는 또 독일 최대 항공사인 루프트한자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소송 이유는 항공사가 공항의 광고판과 광고지 등에 항공요금을 표시하면서 세금과 공항사용료 등을 뺀 금액만 표시했다는 것. 예컨대 독일 베를린에서 미국 시카고까지의 항공요금을 큰 글씨로 ‘649마르크’라고 표시하고 그 밑에 아주 작은 글씨로 공항이용료와 세금 등 119.45마르크를 별도로 표기한 것이다. 이는 최종 요금을 표시하도록 한 항공법규 위반이었다.

협회는 항공사가 시정 요구를 거부하자 단체소송을 냈고 쾰른지방법원은 99년 5월 항공사에 패소판결을 내렸다. 이 소송은 항공사의 항소로 고등법원에 계류 중이다.

이같은 단체소송은 독일에서 소비자 피해 예방과 구제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소비자보호협회의 그루테회장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현대사회에서는 소비자들의 전체 피해는 크지만 개개인별로 보면 아주 작기 때문에 소비자 개인이 직접 소송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따라서 소비자단체가 나서서 다수의 피해자를 동시에 구제하는 제도가 필요한데 단체소송이 적절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의 단체소송은 독일 부정경쟁방지법(UWG)과 보통거래약관규제법(AGBG)에서 인정되고 있다. 소비자 단체소송은 각 지방의 소비자단체가 수행하는 경우도 있으나 소송비용과 소송인력 등의 문제 때문에 대부분 베를린의 소비자보호협회가 수행한다.

소비자보호협회는 기업의 소비자권리 침해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을 경우 먼저 기업을 상대로 경고 또는 이의신청을 하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소송을 제기한다.

소비자보호협회는 지난해 611건의 경고 및 이의신청을 내 이 중 313건이 해결됐다고 밝혔다. 또 소송은 모두 81건을 제기해 24건이 승소했다. 패소는 7건이며 50건은 재판 진행 중.

독일 프랑크푸르트 브룩하우스 로펌의 정하성변호사(교포출신의 독일변호사)는 “소비자단체의 승소 확률은 대략 75%에 이르는데 이는 다수인에게 소액의 피해를 유발하는 특징을 가진 소비자피해에 대한 효과적인 구제책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미국▼

미국에도 이와 유사한 소비자 피해구제 제도가 있다. 이른바 집단소송이다. 이는 피해자 집단 중 어느 한 개인이 대표로 소송을 제기하고 판결 결과가 그 집단 구성원 전체에게 미치도록 하는 제도. 개별적으로 소송을 제기하기 어려운 다수의 소액피해자들이 대표를 선정해 소송을 수행하도록 함으로써 집단적인 피해구제를 가능케 한다. 38년 미국 연방 민사소송규칙에서 채택된 이후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99년 초 미국 법무부 반독점국이 다국적 제약회사를 담합혐의로 처벌하자 이 제약회사로부터 비타민을 구입한 소비자들이 제약회사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해 수백만달러의 합의금을 챙긴 사례가 있다. 미국 법원의 ‘징벌적 손해배상금’ 판결도 소비자 권리 침해를 예방하거나 구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기업에 대해 다시는 소비자에게 똑같은 피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징벌적 차원에서 실제 피해액의 수십배에 달하는 거액을 소비자에게 배상토록 하는 것을 말한다.

96년 미국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시에 살던 79세의 한 할머니는 맥도널드 가게에서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산 뒤 차에 앉아 컵 뚜껑을 열다가 커피를 다리에 쏟아 3도 화상을 입었다. 이 할머니는 맥도널드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맥도널드사가 다른 가게의 커피보다 온도가 5∼10도 높은 상태로 커피를 팔아 이같은 사고를 초래했다는 주장이었다.

주 법원은 맥도널드사에 배상금으로 20만달러를 물도록 했고 이와 별도로 270만달러(약 32억4000만원)의 징벌적 손해배상금을 지불하도록 했다.

또 캘리포니아 지방법원은 7월 세계 최대 자동차업체 GM에 대해 자동차 연료탱크폭발로 중화상을 입은 알리샤 파커의 일가족 6명에게 49억달러(약 5조8000억원)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워싱턴DC의 세실 정 변호사는 “징벌적 손해배상금 제도는 기업들이 물건을 팔 때 소비자가 겪을 모든 상황을 고려하라는 의미”라며 “특히 기업들이 미필적 고의로 소비자의 권익을 침해할 때 일벌백계(一罰百戒)로 처벌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참여연대는 99년 10월12일 현대전자 주가조작으로 피해를 본 투자자 44명을 원고로 해 현대증권과 이 회사 이익치(李益治)회장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지법 남부지원에 냈다. 이 소송은 참여연대가 주도했지만 실제 소송 당사자는 투자자들이다.

참여연대는 또 투자자 1000명을 더 모아 2차소송을 낼 예정. 참여연대 관계자는 “이같은 소송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소송당사자들을 모으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집단소송과 비슷한 제도로 민사소송법상 공동소송과 선정당사자제도가 있다.

공동소송은 1개의 소송절차에 여러 원고 또는 피고가 관여하는 소송이고 선정당사자제도는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는 다수인 중에서 일정한 절차를 거쳐 소송을 수행하는 대표를 선출하는 제도. 그러나 이들 제도는 요건과 절차가 까다로워 널리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증권집단소송에 관한 법률이 98년11월 입법제안됐지만 아직 국회에서 낮잠을 자고 있어 집단소송은 부분적으로도 시행이 안되고 있다.

또 독일과 같은 부정경쟁방지법이 있기는 하지만 이 법은 독일과 달리 ‘소비자의 이익보호’를 목표로 하고 있지 않아 단체소송도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소비자단체는 스스로 나서 소비자의 피해를 대신해 소송을 수행할 수 없다. 또 동일한 유형의 피해를 본 사람들이 배상받기 위해서도 모두 개별적으로 소송을 내야 한다.

이 때문에 소송이 남발되고 사회적 지원의 낭비가 초래되기도 한다. 김주영(金柱永)변호사는 “소액다수 피해자의 구제를 위해서는 집단소송 제도의 도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김변호사는 “우리 경우도 건전한 소비자단체가 여럿 존재하는 이상 소비자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이들 단체에 단체소송 제기권을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베를린·프랑크푸르트·워싱턴〓이수형·이병기기자>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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