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의 우리거리 읽기]수원 華城

  • 입력 1999년 3월 22일 18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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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수원 화성(華城)은 팔달문(八達門) 근처에서 끊긴다. 성이 허물어진 자리에 빼곡이 시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차라리 빈터로 남아 있었더라면 복원이나 제대로 할 수 있었을 것을….

이 땅의 18세기는 왕조의 르네상스였다. 실학(實學)이라는 근대적 정신(modernism)이 진경(眞景·우리 눈으로 바라본 우리의 자연)이라는 근대적 현상(modernity)과 만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 맨 앞에 임금님이 서 있었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시대. 학자가 관료가 되고 정치인이 되는 사회였다. 정조는 노론 벽파의 성리학 맹주들을 학문적 실력으로 아우르던 임금님이었다. 화가이면서 문필가이면서 학자이던 문화의 군주. 권위는 형식이 아닌 실력에서 나온다는 점을 온몸으로 보여준 제왕이었다.

화성은 정조의 야심적인 신도시 계획이었다. 위대한 제왕의 시대가 왔음을, 신하이면서도 경쟁자였던 학자들에게 화려하게 과시하던 전시장이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사무친 한을 풀어놓은 현장이었다.

정조의 승하 이후 이 사회는 다시 어둠 속을 헤맸다. 화성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렸다. 일제는 화성 행궁(行宮·왕의 임시 처소)을 허물고 그 자리에 학교, 병원, 경찰서를 집어넣었다. 한국전쟁의 포화는 성벽과 문루를 허물고 저자거리는 팔달문을 점거했다. 자동차길을 내겠다고 장안문(長安門) 옆을 잘라냈다.

1979년에 화성은 복원되었다. 온 나라의 기와집을 베이지색으로 물들이던 이상한 유행 속에서 화성은 그래도 제대로 복원이 되었다. 그러나 화성 행궁은 복원 대상에서 빠졌다. 군사정권이 군사유적만 복구했기 때문이다. 남북을 잇는 도로의 저항도 드셌다. 전쟁의 포격으로 반신불수가 되었던 장안문은 복구하였지만 주위의 도로는 이미 지나치게 중요한 간선도로로 자리를 잡았다. 문화재 복원의 의지는 팔달문 부근 시장의 생존저항을 깨낼 수 없었다.

화성은 적당히 크다. 두어 시간 여유로이 걸을 수 있을 만큼 작고 철 담장을 쳐서 막을 수 없을 만큼 크다. 우리의 두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드문 문화재다. 화성은 적당히 지루하다. 곗돈 모은 아주머니들이 요란한 관광버스를 타고 와서 사진 찍고 가기에는 너무 밋밋하다. 그러나 꼼꼼히 뜯어보면 마흔 다섯 개의 성곽구조물 중 같은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다채롭다. 화성에 진지한 관광객을 끌어들여야 한다. 그들의 지적호기심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설명판을 바꾸는 일이다. 수원 화성을 해설하는데 ‘외이출목(外二出目)’이고 ‘살미첨차(?遮)’고 하는 용어들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에게는 화성에 관한 완벽한 해설집이 있다. 단언컨데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는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사보고서다. 이 의궤는 충실히 그림까지 그려진 설명서다. 의궤를 토대로 성의 각 부분을 쉽게 설명하라. 성을 만든 마음과 애환을 그림으로 그리고 풀어서 설명하라.

가야 할 길은 멀다. 장안문의 잘린 성곽 사이로는 자동차가 다니고 그 위로 구름다리를 놓았다. 철공소에서 만든 듯한 하늘색 구름다리는 월드컵 개최 광고판이 되어 있다. 이탈리아와 스위스가 그들의 고성(古城)을 이렇게 대접하던가. 고성의 수리는 그들에게도, 그 곳의 건축가에게도 숙제다. 그러나 적어도 고성을 위한 구조물을 짓는데 동네 철공소를 불러들이지는 않는다.

이제 화성 행궁은 복원되고 있다. 수원시는 성곽의 주변에는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게 건축조례로 꽁꽁 묶어버렸다. 박수를 보낼 일이다. 그러나 할 일은 더 있다. 화성의 영화를 되찾아야 한다. 위대한 18세기의 신도시는 지금 지방의 여느 도시와 다를 바가 없이 난삽하다. 성의 안은 밖과 다를 바가 없다. 성내에서 점점 자동차를 밀어내야 한다. 유럽의 어느 성에서 그리 자동차가 분주히 오가더냐.

화성은 수원천에서 다시 한번 전기를 맞았다. 북수문 밖 용연(龍淵)에서 시작하여 남수문으로 흘러나가면 구천(龜川)으로 불리던 수원천. 여기에 복개의 음모가 꾸며지기 시작했다. 주민 숙원사업이기에 반드시 복개해야한다고 공무원도, 국회의원도 주장했다. 용이 사는 연못과 거북이 사는 냇물보다는 주차장이 더 중요하다고 우겼다. 시민들의 반발로 공사는 중지되었다. 우리의 성곽을 지켜오던 것은 항상 백성들이 아니었던가. 수원천도 시민들이 지켰다. 천변에는 사창가와 시장이 들어서 있다. 모두 수원천에 엉덩이를 대고 수원천을 하수도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들을 들어내야 한다. 수원천에 맑은 물이 흐르게 해야한다. 우리는 수원천에 젖과 꿀이 흐르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정과 꿈은 흐르게 할 수 있다.

화성에서 사라진 것이 있다. 정조의 화성행차다. 그 행차는 창덕궁에서 화성, 현륭원(顯隆園)까지 이어지는 화려한 축제였다. 그 축제는 살려야 한다. 물론 세상은 바뀌었다. 우리의 시대는 제왕의 시대가 아니고 시민의 시대다. 곤룡포와 금관조복(金冠朝服) 입은 광대들이 화성행차를 재현함은 의미가 없다. 시민이 참여하고 시민이 구경하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 시민 걷기 대회라도 하자. 창덕궁 돈화문부터 화성 장안문까지 걷자. 어가의 행렬처럼 일박이일이어도 좋고 부지런히 걸어 하루에 끝내도 좋다. 반바지에 김밥을 싸서 함께 그 길을 걷자.

화성에 이르거든 성벽의 돌 틈에 꽃이라도 한 송이씩 꽂자. 함께 온 어린 아들과 딸을 무등 태워 그 들의 손이 닿는 가장 높은 돌틈에 꽃을 꽂게 하라. 그들이 거친 돌을 만져보게 하라. 이 성을 쌓기 위해 땀 흘린 할아버지들의 트고 갈라진 손등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루만지게 하라. 역사는 팔달문의 화려한 현판이 아니고 성벽 구석구석의 돌 틈에 침묵으로 스며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라. 꽃으로 덮혔을 때 화성(華城)은 기꺼이 화성(花城)으로 불려도 좋으리.

18세기가 위대한 왕조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위대한 시민의 시대임을 알리자. 그 가치는 문화에 있다. 그 길에 수원이 앞장서라.

서현<건축가>hyun1029@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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