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방형남 칼럼]부시는 ‘진실’을 말했다

  • 입력 2004년 9월 8일 19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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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빠뜨린 것은 실수였다.”

“공화당 진영에서 연설문을 작성하면서 부주의 또는 무관심 때문에 빚어진 것으로 나도 유감이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을 하면서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한 동맹국 명단에 한국을 포함시키지 않은 데 대해 미국 관리들이 내놓은 해명이다. “별것 아니니 오해하지 말라”는 당부도 덧붙였다고 한다.

▼운명 걸린 연설에 실수라고?▼

정말 그런가. 아무것도 아닌데 우리가 쓸데없이 심각하게 여기는 것인가. 당사자인 부시 대통령과 연설문을 작성했다는 공화당 측근들의 속내는 모른 채 일부 미 정부 관리들의 말을 믿고 넘어가도 괜찮은가.

미국 대통령의 주요 연설 준비 과정부터 따져보자.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자서전 ‘마이 라이프’에서 연두교서 연설 준비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연설 당일에는 (백악관 내) 관저와 이스트 윙 사이에 있는 영화관에서 몇 차례 예행연습을 했다. 나의 공적인 성명을 모두 기록하는 백악관 공보국은 텔레비전용 프롬프터와 연단을 설치한 다음 여러 실무자들이 하루 종일 들락거리며 격식을 차리지 않고 일을 진행시키도록 했다. 우리는 문장을 하나하나 들으며 국회와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상상해보고 연설문 내용을 고치는 등 함께 일했다.”

전당대회의 하이라이트인 대통령 후보수락 연설은 대통령이 의회에서 한 해의 국정운영 계획을 밝히는 연두교서에 못지않게 중요한 연설이다. 대통령 당선 여부가 그 연설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에도 부시는 성공적인 연설 덕분에 민주당 존 케리 후보와의 지지율 경쟁에서 앞서게 됐다. 이른바 ‘전당대회 효과(convention effect)’를 톡톡히 누리는 중이다.

자신의 운명이 걸린 연설을 하면서 부시 대통령이 사전에 원고를 챙겨보지 않았다고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러 차례 읽어보고 수정도 하고 보완도 했으리라고 추측하는 게 정상이다. 동맹국 부분에 이르러서는 거명 대상국과 지도자들의 반응까지 고려했을 것이다.

부시 대통령이 한국을 주요 동맹국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친구로 생각한다면 비록 측근이 빠뜨리는 실수를 했다 해도 스스로 집어넣었을 것이 아닌가. 유감스럽게도 ‘사우스 코리아’는 부시의 관심사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섭섭하다’ 차원의 감정적 문제로 다룰 일이 아니다. ‘한국 홀대’에 담긴 미국의 변화를 포착하는 것이 올바른 대응의 출발이다.

노 대통령이 얼마 전 방송대담에서 밝힌 대로 현 정부는 출범 후 미국에 할 말을 해 왔다. 일부 국민도 가세해 미국을 겨냥한 말과 행동이 넘쳤다. 이제 말과 행동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살필 때가 됐다.

한국의 누적된 공세에 대한 미국의 반격은 이미 시작됐다. 갓 부임한 주한미대사가 우리측 주요 인사를 만날 때마다 “왜 한국에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처럼 현대식 미 대사관이 세워질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국가적 약속을 저버리고 대사관 신축을 무산시킨 한국 정부에 대한 반격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라크에 많은 병사들을 보냈는데 왜 미국으로부터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가. 길거리의 반미시위와 일부 정치인들의 동맹파괴 언행이 공적을 잠식한 탓이다.

▼한미동맹 엇박자 어디까지▼

한미동맹은 대체재(代替財)가 없다. 주변에 일본과 중국이 있지만 현실은 그들 스스로 미국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한국이 미국의 2류 동맹국으로 전락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한미간의 엇박자는 이쯤에서 막아야 한다. 부시 대통령의 연설은 기로에 선 한미동맹에 대한 경종이다. 한국의 급격한 대미인식 변화가 초래한 미국의 대한관(對韓觀) 변화를 바라보고만 있을 건가.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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