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칼럼]황용성/광복절과 「終戰기념일」

  • 입력 1998년 8월 16일 20시 00분


10여년 전 유학시절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가 한일, 중일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었을 때였다. 세미나에 나타난 일본인교수는 갑자기 학생인 필자를 향해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이 아닌가. 어리둥절해 하는 다른 일본 대학원생들을 의식해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직도 일본에는 침략전쟁을 미화하려는 바보 멍청이들이 적지 않네. 이런 일본의 현실을 보고 자네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네. 하지만 저들과 다른 일본인들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일본생활 경험이 짧았던 필자는 솔직히 ‘이런 일본인도 있구나’하고 감동을 받았다.

요즘 2년째 일본 후쿠이(福井)현의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다. 가끔 이웃들과 동네 청소를 함께 한 다음 공회당에서 회식을 한다. 엊그제에도 봉급생활자나 자영업자 등 ‘소시민’들과 청소를 끝내고 그렇게 어울렸다. 참석자는 필자를 빼고는 모두 일본인들. 화제는 주로 일본의 불경기였고 ‘종전기념일’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이야기 끝에 누군가 “조선전쟁(한국전쟁을 일본인들은 이렇게 부른다)이라도 다시 안 터지나”하자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것이었다. 2차세계대전 패전으로 거덜난 일본이 한국전쟁 특수(特需)를 틈타 경제재건의 기초를 다졌던 일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과연 이것이 우리의 이웃이라는 일본인이 할 소리인가’라고 생각하니 섬뜩했다. 일본, 일본인의 참 모습은 무엇일까. 학생 앞에 머리 숙여 사죄하는 대학교수와 이웃 나라에 전쟁이 터지더라도 제 배만 부르면 좋다는 일본인. 이처럼 상반되는 두 얼굴이 있기에 일본과 일본인의 실체를 알기란 무척 어렵다.

생각해보면 일본을 겉, 그것도 한쪽 면만 보고 판단해온 잘못된 일본인식의 역사는 길다. 조선후기 최대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선생도 그러했다. 임진왜란 후 2백년쯤 된 시기에 다산선생은 일본에 관해 이런 글을 남기고 있다.

“이제 일본은 걱정하지 않는다. 저들의 유명한 경학자(經學者)들의 글을 읽어보니 그 풀어낸 뜻이 명백하고 또한 뛰어나다. 판단하건대 이제 그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일본 유학자들의 학문세계만을 보고 다시는 야만적인 침략 따위는 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다산의 ‘낙관적 일본론’은 일제침략으로 허망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일본, 일본인의 모습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보다 중요한것은그들의모습이라기보다는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계산 빠른 일본 정치인들이 선거철에 보수우익적인 유권자층을 의식해 망언을 내뱉으면 그때마다 한국에서는 개탄의 소리가 인다. 하지만 그때뿐. 무엇이 그런 망언을 낳게 했는지를 두 눈 부릅뜨고 살펴보는데는 게으르다. 한일 축구대결도 마찬가지. 지면 나라가 망한 듯하고 이기면 마치 일본 열도를 모두 얻은 듯 시끌벅적한다.

일본의 ‘종전기념일’에는 몇몇 정치인이 신사참배를 한다고 떠들 뿐 대부분의 소시민들은 아무 생각없이 그냥 지나쳐버린다. 우리 역시 광복절을 무감각하게 넘겨온 것은 아닐까. 제법 살게 됐다며 허깨비처럼 살아오다 ‘IMF 국난’을 맞았으니 말이다.

이제야말로 우리의 자세를 바로 다져야 할 때다. 상대가 일본이건 그 무엇이건간에.

황용성(일 나고야경제대 교수·사회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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