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97년 DJP 후보 단일화

  • 입력 2004년 11월 2일 18시 39분


11월 3일. 그 날짜는 1997년 이전부터도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에게 의미 깊은 날이었다.

1971년 도쿄에서 납치된 그가 생사의 기로를 헤맬 당시의 집권자였던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은 1979년 11월 3일 국립묘지에 묻혔다. 그 1년 뒤인 1980년 11월 3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항소심 재판정은 피고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지나간 날들에 대한 감회가 심사를 착잡하게 만들었을 법하지만 1997년 이날 그의 표정은 밝았다.

오후 국회 의원회관.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자민련 김종필(金鍾泌) 총재는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문’에 서명했다.

1961년 5·16쿠데타 이후 36년 동안 반대 진영에 서 왔던 두 사람이 한 배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1973년 11월 1일, 다나카(田中) 일본총리와 회담을 갖고 ‘김대중 납치사건’에 따른 외교 갈등을 매듭지은 주역도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였다.

서명식장에는 ‘단일후보로 정권교체, 내각제로 정치발전’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우리는 기적과 같은 일을 해 냈습니다… 후보 단일화는 우리를 짓눌러 온 지역적 대립, 계층간 대립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김대중 총재의 인사말에 김종필 총재도 화답했다.

“시대적 과업을 수행하려는 저의 고뇌와 결단이 후보사퇴이며 내각제 실현입니다.”

신한국당 이회창(李會昌) 총재의 반응은 신랄했다.

“3김 정치의 연장을 위한 야합의 산물입니다.”

그해 김대중 대통령후보는 이회창 후보를 39만여표 차로 누르고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국민의 정부’ 첫 총리로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취임했다.

4년 뒤인 2001년 9월, 한나라당이 제출한 임동원(林東源) 통일부 장관 해임안이 자민련의 찬성 합류로 통과되면서 DJP 공조는 파기됐다. 내각제 추진이 ‘대답 없는 메아리’로 변한 데 대한 JP의 보복이었다.

역사의 격랑 속에서 겹겹의 인연으로 얽힌 두 사람은 이제 정치사의 뒤 페이지에서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낙조를 바라보고 있다. 충청권은 여전히 동서 갈등의 한가운데서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다. 이곳에 대한 정치권의 끝없는 구애도 ‘3김 시대’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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