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자연 인간]"직접 살면서 유적 가꾸는게 환경보전"

  • 입력 2000년 10월 16일 18시 56분


영국의 시골 도로를 달리다보면 이파리 모양의 휘장이 그려진 갈색 표지판이 이정표 옆에 붙어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바로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국민신탁운동)의 소유지임을 나타내는 표지다. 그리고 이는 완벽히 보존된 자연과 역사유적이 있는 곳임을 표시하는 영국의 자랑이기도 하다.

영국 내셔널트러스트(www.nationaltrust.org.uk)가 소유하고 있는 자산은 전국 토지의 1.5%, 해안지역의 17%에 달한다. 회원이 250만명이고 연간 예산은 3000억원을 넘는 거대한 조직이다.

이들의 활동을 자연환경을 원상태 그대로 보존하는 행위로 보는 것은 큰 잘못이다. 환경보존이란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훼손을 막는 적극적인 행동을 취한다는 의미라는 것. 그리고 주민과 관광객이 자연으로부터 기쁨을 느끼고 후손에게 물려줘야겠다는 의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라고 본부의 한 직원은 말했다.

내셔널트러스트의 모든 활동은 시민의 참여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선 소유지의 대부분은 시민의 기증에 의한 것이다. 때로는 내셔널트러스트에서 매입하는 경우도 있지만 옛 귀족의 저택같은 문화유적은 소유자가 보존의 효율성을 위해 자진해서 신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구나 내셔널트러스트 소유지는 항구적으로 보존해야 한다고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기때문에 시민의 신뢰도는 대단히 높다.

영국은 동네마다 두세군데씩 ‘채리티 샵’(Charity shop·물건을 기증받아 염가에 판매하는 곳)이 있을 정도로 기부 문화가 보편화돼 있다. 또 자국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크기 때문에 유적 훼손을 큰 죄로 여기는 분위기도 내셔널트러스트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한 주민은 말했다.

예산의 3분의1은 회원이 내는 연회비로 충당된다. 회원들은 휴가철에 내셔널트러스트의 영지를 찾아가 여가를 보낼 수 있다. 마치 콘도미니엄 회원권과 비슷하지만 이 경우엔 상업성과는 거리가 멀고 회원들도 청명한 자연을 즐기는 것이지 놀자판을 벌일 수는 없다. 또 회원들은 환경보전 정책 결정에도 적극적인 의사를 표시한다. 그 밖의 예산은 소유지내 세입자들이 내는 전세금과 기념품 등 수익사업으로 충당된다.

자원봉사자들도 큰 몫을 한다. 런던 외곽에 위치한 17세기초 귀족의 저택인 ‘햄하우스’에는 총 18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관광객을 안내한다. 나이도 천차만별인 이들은 각 방마다 한사람씩 붙어서 소장품의 유래를 설명한다. 깔끔하게 복원된 영국 정통식 정원에도, 심지어는 기념품점에도 자원봉사자들이 일한다.

자원봉사자 대부분은 지역주민이다. 이곳에서 예배실을 설명해주고 있던 파멜라 스탠튼씨는 “어려서부터 이 저택을 보며 살았기 때문에 정도 들었고 보존정책에 동감해서 봉사한다”고 말했다.

출퇴근 개념이 없이 나오고 싶을 때 나오면 되지만 보통 하루에 20명 이상씩 봉사자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운영에 지장은 없다고 덧붙였다.

영국 남서부에 위치한 레이콕은 아예 ‘트러스트 마을’로 이름붙여졌다. 1944년 이곳 유지인 마틸다 탈보트부인이 13세기 수도원으로 건립됐던 사원을 비롯한 마을 전체를 내셔널트러스트에 기증했다.

이곳은 농가 학교 상점 등이 모두 18세기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탓에 영화 ‘엠마’와 ‘오만과 편견’의 촬영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마치 한국의 민속촌과 비슷한데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이곳은 관광지이기 이전에 주민들이 실제로 생활하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마을 운영과 환경보전을 위한 경비의 62%는 주민 86가구가 내는 전세금이다. 내셔널트러스트 직원으로서 이곳 관리인인 그레함 허드씨는 “환경보전에 동참해야 하기 때문에 세입자를 받아들일 때 엄격한 심사를 거치고 서약을 받는다”고 전했다.

주택구조와 용도에 맞춰 적당한 세입자를 받아들이지 사람 때문에 집을 뜯어고치지는 않는다. 또 이 마을사람의 후손일 경우 보다 보존에 적극적일 것이기 때문에 세입자를 받아들이는데 우대한다고. 실제로 탈보트가(家)의 후손들도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여행철이면 국내외 관광객으로 북적대는 이곳에 큼직한 식당이나 상점은 찾아볼 수 없다. 식당은 고작 주민들이 이용하는 펍이 고작이고 기념품가게도 내셔널트러스트가 운영하는 한군데뿐이다.

유난히 집에 애착이 많은 영국인들. 퇴근 후면 정원을 손질하거나 페인트칠을 하는 가장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지만 요란한 신식 건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전통을 유지하면서 아주 조금씩 개선해나가는 국민성은 내셔널트러스트에도 잘 나타난다. ‘현재 시점에서 살아있는 전통’이 이들의 모토인 것이다.

▼인터뷰/줄리앙 프리디우 사무부총장▼

“환경보전도 사람들이 누리고 볼 수 있는 것이라야 합니다.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장소에 무엇이 적합한지를 고민해야 하죠. 죽어있는 역사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살아있는 지역을 조성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내셔널트러스트 본부의 줄리앙 프리디우 사무부총장은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이 ‘보존’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수차례 강조했다. 적합하다고 판단된다면 건물을 짓는다고 해도 대의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라는 것.

“모든 판단은 사안마다 다르고 의사결정에는 지역주민과 전문가들이 모두 참여합니다. 건축 조경 등 다방면의 전문가들이 회원으로 포진하고 있어서 자문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영국도 개발과 보전의 마찰이 있다고 프리디우씨는 전했다. 그러나 내셔널트러스트는 법적 보호를 받고 있지만 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있기 때문에 영지내 대형 도로건설을 거부하는 등 독자적인 환경보전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소유권과 환경권이 융합된 형태이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또 이 모든 것은 영국의 뿌리깊은 기부 문화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죠. 기증지가 대부분인 만큼 세제혜택도 상당합니다.”

프리디우씨는 “우리는 청지기”라고 말했다. 신이 주신 자연이라는 선물을 맡아서 잘 가꾸고 지키는 집사라는 것. 그리고 청지기는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며 한국의 시민단체도 열심히 활동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내셔널 트러스트는…▼

내셔널트러스트(자연신탁국민운동)는 1895년 영국에서 시작된 환경보전운동으로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과 기부를 통해 자연자원 및 문화유산을 확보해 보전하는 것이다. 토지소유권을 바탕으로 환경보전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현재 25개국으로 확산됐다.

19세기말 무분별한 산업화로 전원지역 환경이 크게 위협받게 되자 일부 사회운동가와 성직자들이 자연자원 매입운동을 벌이게 된 것이 운동의 시작이 됐다. 이 운동이 시민의 호응을 얻자 영국정부는 1907년 ‘국민신탁법’을 제정해 활동을 지원했다. 이 법에서 부여한 내셔널트러스트의 권한은 ‘토지를 양도불가능하게 지키는 것’으로 신탁된 토지의 매도나 담보설정을 금했다.

한국의 내셔널트러스트(www.nationaltrust.or.kr)는 올해 1월에 정식으로 창립됐으나 확보된 자산은 아직 없다. 강원 영월군 동강, 광주 무등산, 강화도 매화마름 군락지, 서해안 갯벌 등을 후보지로 선정하고 모금운동을 진행중에 있다. ARS전화 700―0998을 이용하면 1회 통화에 2000원씩 기부할 수 있다.한편 한국 내셔널트러스트는 내달 20일까지 ‘한국의 NT후보지 웹 콘테스트’ 참가 신청을 받는다. 보존해야 할 자연환경을 소개하는 웹사이트를 만들어 응모하면 되고 대상 수상자는 호주 내셔널트러스트 여행 기회가 주어진다. 안내는 www.ntrust.or.kr.

<런던〓김준석기자>kjs359@donga.com

김재현(건국대 산림자원학 교수) 김정인(중앙대 산업경제학 교수) 김창섭(에너지관리공단 정책팀장) 서왕진(환경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 유상오(주택공사 도시개발부) 이은희(서울여대 원예학과 교수) 홍욱희(세민환경연구소장) <이상 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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