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코리아/인요한]북한 조문에 대한 단상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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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10여 년 전 일이다. 고향인 전남 순천에서 급보가 왔다. 순천에서 이른바 ‘조직’을 나름대로 큰 규모로 이끌어 온 고향 형님이 지병인 암으로 사망했다는 전갈이었다. 나는 친구들의 부탁으로 이 형님에게 수술을 잘하는 병원을 소개해 준 인연이 있었다.

장례식장에 갔더니 검은 양복을 입은 덩치 큰 ‘어깨’들이 길 양쪽으로 50m가량 줄 지어 늘어서 조문객을 맞고 있었다. 덩치로는 이들에게 밀리지 않지만 기세에 눌렸던 탓인지 나는 마치 영국의 유명한 슬랩스틱 코미디 주인공 ‘미스터 빈’처럼 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빈소로 들어갔다.

사실 고인이 생전 ‘착한 일’을 했다고 보기는 힘든 분이어서 “천국에 가게 해 달라”고 빌기에는 차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정 옆에 서 있는 유가족을 위해 기도했다.

이날 장례식장에는 순천뿐 아니라 전남 주요 조직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이들 대부분은 생전에 고인과 각종 지역 이권을 놓고 치열하게 대립하고, 때로는 서로 조직원들의 희생까지 치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모두 고인에 대해 좋은 말만 했다. 이처럼 장례식장에서는 적에게도 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다툼까지 중단하는 문화는 외국에서는 보기 힘든 한국의 미풍양속이다.

북한 통치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례식장에 참석하는 문제를 놓고 정부가 방침을 정리했지만 논란이 여전하다. 정부 차원의 조문단을 보내지 않고 제한적으로 민간의 답례성 방북만 허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정부 차원에서 조문단을 보내야 한다고 본다. 이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 동아일보 여론조사에서도 정부가 조문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응답은 50%를 넘었다.

나는 올해 5월까지 북한에 23번 다녀왔다. 북한은 외국 조의 대표단을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북한의 시각으로 볼 때 여기서 ‘외국’에 한국은 포함되지 않는다. 북한은 한국을 ‘같은 민족’으로 보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한 안내원이 “남조선이 핵폭탄을 만든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쓰지 않겠지”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다. 한국 정부가 조문단을 보낸다고 하면 북한은 흔쾌히 이를 받아들일 것으로 확신한다.

명분도 있다. 북한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 공식 조문단을 서울에 보낸 바 있다. 이에 대한 답례라는 점에서 충분히 명분이 있다. 공식 조문단이 부담스럽다면 일례로 민주당 박지원 의원 등에게 특별 직함을 줘 조문단으로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주석 사망 당시 남북관계 경색 탓에 한국이 조문단을 보내지 않은 일을 기억하고 있다. 1997년 첫 방북 이후 올해 초까지 북한 방문 때마다 “어떻게 사람이 죽었는데 오지 않습니까. 우리는 도리를 다했습니다”면서 섭섭해하는 불만을 들었다.

‘조문 정치’는 남북 간 신뢰 회복과 협력관계 구축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 잃을 것은 별로 없고 얻을 것이 더 많다고 본다. 현재 남북관계 경색의 실마리를 제공한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에 대한 사과 등을 끌어낼 수 있는 지렛대로 활용할 수도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이후 한반도에는 큰 변화의 파도가 몰아칠 것이다. 6자회담처럼 남의 도움을 받는 일이 아니라 남북이 직거래할 수 있는 기회가 손에 잡히는 곳에 있다. 당장의 이득뿐 아니라 통일을 향한 먼 미래를 위해서라도 한국이 ‘큰형님’으로서 먼저 품고 베푸는 모양새를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한 인간의 죽음이라는 영원의 순간이 한반도가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기초가 되기를 소망한다.

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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