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국민의 정부]<38>4부 ④공동선언문 막전막후

입력 2003-10-01 17:51수정 2009-10-10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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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6·15공동선언을 만들어 내기 위해 무려 11시간이 넘는 토론과 협상을 했다. 2000년 6월 14일 저녁 두 정상이 백화원 영빈관에서 정상회담 합의문을 교환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사실 고려민주연방제는 시대착오적인 냉전시대의 유물입니다.”

2000년 6월 14일 평양시내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과 마주 앉은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은 이같이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고려연방제는 북한이 금과옥조처럼 내세워 온 통일방안이었기 때문에 김정일의 이 말은 DJ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DJ는 ‘이때다’ 싶어 남북간의 교류협력과 신뢰회복에 초점을 맞춘 ‘연합제’ 안에 대해 본격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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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연방제는 연방정부가 외교권과 군사권을 갖고 지역정부는 나머지 권한을 갖는다는 것인데 남북 대치상황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갑자기 군대가 통합이 되겠습니까. 남북이 현 체제와 현 정부를 유지한 채 통일작업을 해야 합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얼마나 걸릴까요.”

“20∼30년은 걸릴 것입니다.”

“그렇게 빨리 되겠습니까. 40∼50년은 걸릴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남쪽 주장에 찬동합니다.”

정상회담의 최대 난제 중 하나였던 통일방안 문제는 김정일의 전향적인 태도에 힘입어 의외로 쉽게 풀리는 듯싶었다. 다만 이를 어떤 방식으로 공동선언문에 담느냐 하는 기술적인 문제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막상 공동선언문 작성에 들어가자 상황이 달라졌다. 김정일은 “남북 양쪽의 통일방안에 대한 생각이 거의 같으니, 합의를 하되 이름은 ‘연방제’로 하자”라며 연방제 표현을 고집하고 나섰다.

물론 DJ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연방과 연합이 다른 개념인 데다 북한이 지속적으로 주장해오던 ‘연방제’라는 단어를 받아들일 경우 발생할 남한 내의 정치 사회적 파장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30∼40분에 걸친 논쟁 끝에 DJ와 김정일은 결국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한다’(공동선언 2항)는 어정쩡한 선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이 공동선언에서 최초로 등장한 표현. 그러나 양측은 문안 합의에 급급해 그 개념을 확실하게 정리하지 않음으로써 정상회담 이후 남한 사회에서 이 말의 해석을 둘러싸고 보-혁 갈등이 빚어지는 등 적지 않은 후유증을 남겼다. 정상회담 이후에도 북측은 각종 매체를 통해 고려연방제의 당위성을 계속 주장했기 때문이다.

‘6·15 공동선언문’ 합의는 이처럼 한구절 한구절 어려운 과정을 거쳐 이뤄졌다.

공동선언의 서명 당사자를 누구로 하느냐 하는 것도 하나의 고비였다. 김대중 김정일 이름이 들어가는 형식으로 하자는 남측 주장에 대해 김정일은 북한 헌법에 따른 국가원수는 김영남(金永南·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라며 난색을 표하다가 마지못해 응했다.

임동원과 김보현(金保鉉) 국정원 3차장, 북측 김용순(金容淳) 아태평화위 위원장, 임동옥(林東玉)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안경호 조평통 서기국장 등의 실무 협의를 거쳐 공동선언문이 최종 합의된 것은 14일 늦은 저녁. 정상 만찬장에서 이를 보고받은 DJ는 갑자기 김정일을 이끌고 발언대로 나가 “우리 두 사람이 공동선언에 완전히 합의했습니다. 모두 축하해 주십시오”라며 김정일의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두 정상은 오후 11시20분 백화원 영빈관 내 별도의 방으로 옮겨 남북 공동선언문에 서명했다. 14일 서명하고서도 굳이 ‘6·15’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DJ의 요구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DJ정부 때 고위직을 지낸 A씨는 “DJ는 날짜가 주는 어감이 6·14보다는 6·15가 좋다는 이유로 공동선언 명칭을 굳이 ‘6·15공동선언’으로 해야 한다고 고집했다”고 말했다.

DJ는 그러면서도 공동선언문 서명 발표는 14일 밤에 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야 15일자 조간신문에 선언문이 실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당초 공동선언문에 서명하는 것을 15일 다시 만나서 하자는 입장이었다. 결국 DJ는 한동안 김정일을 설득해야 했다.

“오늘밤 안에 합의문 서명을 마치고 내일 날짜 조간신문에 이 내용이 보도돼야 빛이 난다. 민주주의 언론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조간신문에 공동선언이 실려야 전 세계로 뉴스가 나간다. 지금 외신기자까지 포함해 수천명이 공동선언을 기다리고 있다.”

이에 김정일은 “그 소원을 못 들어 주겠습니까”라며 이를 흔쾌히 수용했다.

공동선언문 서명 과정에서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DJ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B씨의 설명. “보통 남북이 서명한 합의문을 교환할 때 우리는 청색 표지를 쓰는데, 당시는 아무리 찾아도 청색 표지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 우리측 상황실 근처에 있던 권호웅(일명 권민·權珉) 북측 아태평화위원회 참사에게 과거 남북회담 때 우리가 북측에 전달했던 청색 표지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해 겨우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5월 정상회담 준비접촉에서는 북측이 자신들이 사용하는 적색 표지를 준비하지 않아 우리가 보관했던 것을 빌려줬던 일이 있었으니 피장파장이 된 셈이다.”

남북 정상 합의는 그렇게 어렵게 이뤄졌지만,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은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정상회담 직후부터 ‘낮은 단계의 연방제’ 등 새로운 내용이 담긴 정상간 합의의 기본 취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정부가 차분히 대국민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정상회담의 성과를 과시하는 데만 급급한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DJ 스스로도 평양에서 귀환한 다음날인 6월 16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김정일 위원장에게 교황을 초청토록 요청했다. 조만간 교황의 북한방문이 이뤄질 것이다”고 말하는 등 정상회담 결과에 대해 ‘장밋빛 설명’으로 일관했다.

특히 정상회담 합의문 2항의 연방제 문제는 우리 내부에서 이념 갈등으로 이어졌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용어는 고려연방제의 전 단계로, 자유민주주의 통일의 전 단계인 남북연합과는 결코 같을 수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남북문제 전문가들은 “경부선과 호남선이 대전까지 같이 간다고 해서 양자의 목적지가 같다고 말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또 우리 사회 내부의 공론화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DJ는 6월 16일 국무회의에서 “정상회담에서 내가 오랫동안 구상해온 남북 연합 연방 통일의 3단계 통일방안에 대해 설명했다”고 밝혔다. 이는 DJ가 우리 내부의 공론을 거쳐 합의된 통일 방안이 아니라 개인적 방안을 갖고 북측과 합의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대목. 당연히 정상회담 결과가 국민적 합의를 거치지 않은 것이라는 비난이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해 정부의 통일정책을 담당했던 C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노태우(盧泰愚) 정부 때 만들어진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나 이를 이어받은 김영삼(金泳三) 정부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DJ의 3단계 통일방안을 참고로 해서 만든 것이었다. 우리 통일방안은 ‘선(先) 교류협력 후(後) 통일’을 추진하는 것인데 북한이 ‘낮은 단계’라고 한 것은 교류협력을 중시하는 우리 연합제 구상에 접근한 것으로 남북이 평화공존하자는 것을 합의한 것이다. DJ 정부가 새로운 통일방안을 제시하지 않았던 것도 과거 정부의 통일 방안과 DJ 본인의 통일방안간에 별다른 차이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아무튼 정상회담 이후 김정일의 캐릭터 인형과 선글라스가 불티나게 팔렸고, 남북관계를 소재로 한 광고 제작이 잇따르는 등 우리 사회 내부의 대북인식 변화가 급격하게 진행됐다. 그러나 정부는 이 같은 변화를 정리할 기회를 마련하지 못했다. 보수층에서는 DJ 정부가 대북화해협력에 집착해 좌경화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2001년 8월 15일의 평양 민족통일대축전의 일부 참가자들이 북한 체제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 것을 계기로 보수단체들이 항의 시위에 나서면서 대북문제를 둘러싼 이념갈등은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했다.

▼“통일방안 논란 일단 덮어둔 것”▼

햇볕정책의 전도사를 자임했던 임동원(林東源) 전 국가정보원장은 6·15공동선언의 ‘연방제’ 논란에 대해 본보 특별취재팀에 “남북은 연방제를 합의한 것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앞으로 연합제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했는데, 이는 남북이 ‘당분간 통일 방안을 덮어두고 평화공존의 길을 모색하기로 합의했음을 의미한다는 게 임 전 국정원장의 설명이다.

임 전 국정원장은 또 ‘6·15 공동선언’이 새로운 남북관계를 정립하는 이정표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그는 남북정상회담의 의미와 성과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안보 위협을 해소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둘째,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통일 방안에 대한 접점을 찾아냈습니다. 김 국방위원장은 현 정세하에서는 고려민주연방제가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남측의 연합제가 합리적이며 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습니다. 셋째, 남북이 교류협력을 활성화함으로써 서로 신뢰를 다져 가자고 합의했습니다.”

물론 임 전 국정원장의 이런 평가와는 달리 북한의 핵개발 및 대북송금 특검 결과 등으로 인해 남북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의 의미는 상당 부분 퇴색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변화 조짐이 하나둘씩 나타나는 등 햇볕정책이 유의미한 정책이었음이 증명되고 있다는 것이 임 전 국정원장의 주장이다. 북한이 경제개혁에 해당하는 ‘경제관리 개선조치’를 취하고 자본주의적 경쟁 체제를 도입하고 있는 것은 햇볕정책이 내심으로 노렸던 효과 즉, 북한 주민들에게 ‘돈맛’을 알게 해주겠다는 취지와 부합하는 결과라는 얘기다.

“DJ정부는 햇볕정책을 추진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항을 늘 염두에 뒀습니다. 첫째, 북한 최고지도자와 직접 접촉해 위로부터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자. 둘째, 보다 많은 접촉을 통해 북한 주민들이 아래로부터 변화할 수 있게 한다. 셋째, 경제적 접근을 통해 대남 의존도를 높인다. 넷째, 군사적 신뢰 구축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자는 것 등입니다. 이들 목표 중 상당부분이 정상회담과 뒤이은 남북교류 활성화를 통해 가시권에 들어왔다고 봅니다.”

▼특별취재팀 ▼

▽팀 장=이동관 정치부장

▽정치부=반병희 차장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명건 이승헌 기자

▽경제부=홍찬선 박중현 김두영 기자

▽기획특집부=윤승모 차장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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