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국민의 정부]4부 ②韓-美의 엇박자

입력 2003-09-17 17:52수정 2009-10-10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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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미관계는 미군장갑차 여중생 치사사건으로 불붙은 촛불시위가 반미로 비화되고, 이에 대응해 미국에서도 반한 기류가 형성되는 등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부른 것은 북한에 대한 선전포고이며, 한반도를 영구 분단시키려는 미국의 계획적 책략이다.”

2002년 1월 18일 부시 대통령의 방한을 하루 앞두고 열린 국회 본회의장. 민주당 송석찬(宋錫贊) 의원은 대정부 질문을 통해 이같이 주장하며 부시 대통령을 ‘악의 화신’이라고 지칭해 파문을 일으켰다.

청와대와 민주당 지도부는 송 의원의 발언 직후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민주당 지도부는 송 의원이 당과 협의 없이 돌출발언을 했다고 해명했고, 청와대 관계자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송 의원의 발언은 우방 정상의 방한을 앞두고 대단히 적절치 않은 것’이라며 민주당 지도부에 강한 유감을 표시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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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제 여권의 내부 기류는 이와는 정반대였다. 송 의원 자신의 증언.

“발언 파문이 인 뒤 언론에 ‘당과 상의 없이 나 혼자 원고를 작성했다’고 해명을 하긴 했지만, 이는 대외용일 뿐이었습니다. 대정부 질문을 통해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자는 게 당 공식회의에서 협의된 내용이었죠. 당 지도부는 내 발언이 나갈 경우 국회 파행 사태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해 나의 대정부 질문 순서를 마지막인 9번째로 하는 등 사전 대비까지 했습니다.”

송 의원은 자신의 발언 직후 청와대측이 DJ의 유감 표시를 공개한 데 대해서도 “그건 DJ의 공식 반응일 뿐이다. 사실 DJ는 내 주장에 상당히 공감했다”고 털어놓았다. 송 의원은 “한미정상회담(20일)이 끝난 며칠 뒤 DJ가 직접 전화를 걸어 왔다. ‘악의 화신 발언 때문에 질책을 듣겠구나’하고 걱정했는데, 의외로 DJ는 ‘송 동지의 대정부 질문 내용이 내 생각과 거의 같다. 미국이 새로운 냉전 체제를 구축하려는 것은 문제다’라며 격려하더라”고 말했다.

다만 송 의원의 발언 중 ‘악의 화신’이란 표현은 사전 협의된 것이 아니었다. 송 의원은 “이 때문에 주한 미 대사관측이 청와대에 ‘송 의원의 발언이 집권당 당론이냐’며 따졌고, 청와대와 당 지도부는 나에게 ‘적당한 해명을 해야겠다’며 사과 성명 발표를 종용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때를 전후해 DJ가 부시 대통령에게 전라도 사투리로 욕을 해대는 내용이 담긴 ‘엽기 DJ’가 인터넷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송 의원의 주장대로라면 DJ는 부시 대통령에 대한 표면상의 환대와 달리 마음속으로는 ‘엽기 DJ’와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실제 부시 대통령에 대한 DJ의 감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 여권 핵심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DJ의 의중에 정통한 한 여권 중진 의원은 이 당시 “부시 대통령이 대북 정책에 대해 무엇을 안단 말이냐. DJ가 성공시킨 남북화해협력을 부시 대통령이 망치고 있다”고 사석에서 토로하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에 대한 DJ측의 이 같은 ‘이중적 태도’는 2002년 대통령선거전의 와중에서 전개됐던 촛불시위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같은 해 말 촛불시위가 반미로 이어지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자 DJ는 “반미는 안 된다. 주한미군 철수 주장은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는 공식 언급을 내놓았다.

그러나 시위대가 대형 성조기를 찢는 상황이 벌어진 날 저녁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시위가 평화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우리 젊은이들이 자랑스럽다”고 오히려 시위를 고무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12일 12일에는 북한이 핵동결조치 해제 및 전력생산용 핵시설 가동 재개를 선언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한 청와대 관계자는 TV를 통해 관련보도를 지켜보다가 무심결에 “역시 북한은 멋있다. 민족 자존심을 확실하게 세운다”고 말했다가 주위사람들의 제지를 받고 급히 발언을 취소하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2002년 청와대의 분위기는 ‘친북적’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결코 ‘친미’는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DJ정부의 청와대와 민주당이 부시 대통령에 대해 ‘악의 화신’이라고 지칭할 만큼 불만을 갖게 된 데는 그럴 만한 배경이 있다. 부시 대통령이 미 민주당 소속인 전임 빌 클린턴 대통령과 달리 DJ의 대북정책에 대해 사사건건 반대하는 바람에 남북한의 화해협력까지 차질을 빚게 됐다는 것이 DJ측의 상황인식이었기 때문이다. 2002년 당시 청와대에서는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앨 고어 후보가 당선됐다면 한반도의 상황이 180도 달라졌을 것”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올 정도였다.

부시 대통령측은 2000년 말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부터 공개적으로 DJ의 대북정책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2001년 1월 19일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 내정자는 부시 대통령 취임 축하차 방미 중인 한화갑(韓和甲) 민주당 최고위원을 만나 “햇볕정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이런 뜻을 김 대통령에게 전해 달라”고 말했다.

이 같은 부시 대통령측의 태도에 DJ정부의 외교안보담당자들은 당혹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 입장이 비록 예고된 것이기는 했지만 취임도 하기 전에 이처럼 거칠게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DJ였다고 한다. DJ는 아미티지 부장관의 발언 내용을 전해 듣자마자 직접 방미 대표단에 전화를 걸어 미국의 진의를 재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시 행정부가 DJ의 햇볕정책을 대놓고 비판한 데는 DJ측이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의 재집권을 옹호했다고 판단한 데 따른 보복적 성격도 있다는 시각도 있다.

김영삼(金泳三) 정부에서 요직을 지낸 한 관계자는 “미국 쪽에서 들으니 부시 대통령 진영에서는 DJ가 2000년 미 대선 때 미국 내 지지그룹을 동원해 고어 후보에게 헌금을 몰아주는 등 노골적으로 친민주당을 했다는 얘기가 회자됐다고 한다”고 말했다.

한미관계가 부시 대통령 출범 이후 악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한미관계의 균열이 시작된 것은 훨씬 오래 전부터라는 것이 외교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클린턴 행정부 때도 남북관계 개선을 우선시하는 DJ정부와 북한의 핵 미사일 포기가 관심인 미국간에는 기본적인 입장차이가 있었다.

2000년 3월 9일 DJ가 독일 베를린 자유대에서 전력과 사회간접자본(SOC) 건설 등 과감한 대북지원 구상을 담은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을 때도 한미간에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이날 에번스 리비어 미 국무부 한국과장은 워싱턴 주재 한국 대사관의 심윤조(沈允肇) 정무참사관에게 전화를 걸어 “도대체 베를린 선언의 목표가 뭐냐.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며 항의성 질문을 퍼부었다. 베를린 선언과 관련해 미국과 사전협의가 없었던 데 대한 불만 표시였다.

이에 대한 이정빈(李廷彬)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설명.

“북한과 미국은 베를린 선언 전날 뉴욕 채널을 통해 접촉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오비이락(烏飛梨落) 이라고 할까. 북한이 첫 만남에서 전력지원을 비롯해 각종 대북지원 요청을 했다가 바로 다음날 이를 거둬들였습니다. 그 상태에서 대북 전력지원 내용이 담긴 베를린 선언이 나왔으니, 미국은 남북이 서로 짜고 뭔가를 도모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죠.”

이 전에도 한미관계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DJ정권 초기인 98년 11월 시작된 금강산관광이 미국의 불만 요인이었다. 현대가 관광 대가로 9억4200만달러의 현금을 북한에 지원하기로 한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한 외교 관계자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원칙을 갖고 있던 미국은 북한 당국이 현찰을 갖게 되면 이를 곧바로 군사비로 전용할 것으로 우려했다. 대북 현금지원에 대한 미국 정부의 불만은 사실상 DJ정권 내내 지속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당사자의 변▼

‘국민의 정부 비화’ 8월 28일자 “‘제일은 연내 매각’ 한마디에 18조 날려” 기사와 관련, 금융감독위원회는 금감위 실무자들이 대한생명을 한화컨소시엄에 매각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 사실이 없다고 밝혀 왔습니다.

▼“남북 정상회담用 베를린 선언 급조”▼

DJ 정부는 ‘베를린 선언’에 대해 남북교류를 정부 차원으로 격상시키겠다는 의지를 담은 획기적 구상이라고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남북 정상회담을 겨냥해 ‘급조한’ 작품이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사후 설명이다.

임동원(林東源) 전 국가정보원장은 “베를린 선언은 박지원(朴智元) 문화관광부 장관이 2000년 3월 8일 싱가포르에서 송호경(宋浩景)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을 만난 직후 나왔다. 정상회담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고 말했다.

당초 선언문 초안에는 사회간접자본(SOC) 등 대규모 지원 얘기가 없었지만, 남북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이 임박하면서 관련 문안이 포함됐다는 것이다.

선언문은 외교부와 통일부가 초안을 마련하고 황원탁(黃源卓) 외교안보수석이 정리해 DJ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최종 문안은 DJ가 유럽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직접 작성했다. 선언문을 인쇄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만들어진 셈이다.

워낙 졸속이다 보니 정부 내에서도 손발이 맞지 않아 각자 ‘딴소리’를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박재규(朴在圭) 통일부 장관은 3월 9일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4·13 총선을 앞두고 (남북관계를) 너무 서두르면 북한이 어려워할 뿐 아니라 오해의 소지도 있다”며 “당국간 회담도 4·13 총선 이후에 매듭을 지으면 국민과 야당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방송이 나간 이후 박 장관은 DJ로부터 “너무 많은 얘기를 하면 안 된다”는 내용의 ‘경고’를 받았다.

베를린 선언은 실현 가능성과 관계없이 북한에 대북지원 기대만 부풀려 주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선언에는 북한의 도로 항만 철도 전력 통신 등 SOC를 모두 지원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지만, 이는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정부는 4월 3일 베를린 선언의 후속조치로 ‘대북한 경제 특수 관련 참고자료’를 발표해 “정부 차원의 교류가 가시화하면 앞으로 북한 경제 특수가 예상된다”고 장밋빛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가까운 미래에는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얘기였다.

▼특별취재팀▼

▽팀 장=이동관 정치부장

▽정치부=반병희 차장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명건 이승헌 기자

▽경제부=홍찬선 박중현 김두영 기자

▽기획특집부=윤승모 차장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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