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메드] (인터뷰) 정병모 교수 <한국의 채색화> 출간 “한국 미술사에 색채를 입히다”

  • 입력 2015년 2월 10일 15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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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모 교수, 민화의 새로운 발견
한국 미술사에 색채를 입히다

한국의 미술사를 깜짝 놀라게 할 도록이 출간되었다. 이 도록에 담긴 그림들은 교과서에 나오는 유명화가나 지체 높은 선비가 그린 수묵화가 아니다. 조선시대 이름 없는 환쟁이들이 그려낸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채색화이다. 백의민족이라 불리던 동방의 작은 나라가 만들어낸 색채가 세계를 매혹시키고 있다.

EDITOR 김수석 PHOTOGRAPHER 권오경

젊음의 거리 홍대에서 그나마 다소 한적한 분위기의 전통찻집을 골라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정병모 교수와 마주했다. 정교수는 오랜 시간 준비해온 프로젝트의 막바지 작업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태블릿 PC를 꺼내 그림들을 넘겨서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한국화라고는 믿기지 않는 화려한 색과 놀라운 상상력을 뽐내는 그림들이 담겨있었다.

“<한국의 채색화>라는 제목의 민화와 궁중회화 명품도록 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이제까지 없었던 도록이지요. 이 책을 완성하기까지 10여 년에 걸친 자료조사와 수집 기간이 필요했어요. 권당 순수 제작비만 1억이 넘게 들어갔습니다. 굉장한 정성과 노고가 담긴 책이에요. 한 점 한 점이 놀라운 미술적 가치를 담고 있어요.”

세계 곳곳에 숨겨져 있던 민화가 그 빛을 드러내다

<한국의 채색화>는 국제적인 프로젝트로 이뤄졌다. 국내의 편집위원과 학자들은 물론 외국에 거주 중인 채색화와 민화, 궁중회화에 정통한 이들이 힘을 모았다.

정 교수는 지난 10여 년간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 박물관, 개인수집가 등을 찾아다니며 숨겨진 한국의 채색화를 발굴해냈다. 그리고 원화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내로라하는 사진작가들과 편집디자이너들의 기술을 빌렸다.

B4사이즈 크기의 책 세 권으로 구성된 <한국의 채색화>에는 총 1,000여 장의 진귀한 명화들이 담겨있다.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이제껏 알려지지 못하고 숨겨져 있던 한국의 진정한 채색화들을 찾아냈습니다. 한 번은 일본에서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을 촬영하게 되었는데, 함께 동참한 박대성 화백이 삼배를 하자고 제의를 하시더군요. ‘아이고! 하나님, 이렇게 좋은 명품을 우리에게 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하며 절을 올리자, 그 옆에서 따라 절을 하던 저도 눈물이 났습니다. 한국회화사를 30년 넘게 해왔지만, 처음으로 작품 앞에서 절을 한 것입니다.”

<한국의 채색화>에는 근래에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지고 있는 민화의 작품도 상당수가 담겨 있다.

민화는 한국 미술의 가치를 드러내는 작품임에도 한국에는 여태껏 그럴싸한 도록 한 권조차 없었다. 기껏해야 전시도록이 전부였다. 도리어 일본에서는 한국 민화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이미 30여 년 전에 2권의 민화도록을 편찬했다.

“한국화라고 하면 흔히 수묵화를 먼저 떠올리는데, 한국 회화의 역사는 본래 채색화부터 시작했어요. 고구려 고분벽화나 고려의 불화 등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죠. 그런데 조선시대에 와서 사대부들이 색채를 배제하거나 적게 쓰는 수묵화 또는 그와 관련한 문인화를 그리면서 채색화를 하대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미술사학자들은 그런 사조를 이어받아 문인들이 그린 수묵화에 가치를 매겼죠. 그런데 대부분의 문인화는 학자가 공부하면서 그린 아마추어의 그림입니다. 그림들의 크기도 대체로 다 작지요. 그런 그림을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대표 그림이라고 소개해온 것입니다.”

조선 500년 동안 푸대접받아온 채색화는 조선 말기인 19세기에 와서 민화와 궁중장식화를 통해 기적처럼 부활했다. 하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해외 반출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미국과 프랑스의 문화조사관과 민속학자들이 민화를 대량으로 구입해 갔고, 일본에서는 한국 민화를 수입하는 붐까지 일었다.

한국의 민화는 미국, 캐나다, 프랑스,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일본, 중국, 대만, 베트남 등 세계 곳곳에 감쳐줘 있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는 민화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서민들의 그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괜찮은 민화들은 죄다 해외로 나갔다는 말이 결코 과장된 게 아닙니다. 그래서 해외조사가 절실했어요. 민화에 대한 단서만 있으면 어디든 날아갔습니다. 무모한 도전 같았지만, 묵묵히 전진하다 보니 값진 그림들을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채색화>에 담긴 그림 천여 점 중에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그림이 70% 이상 됩니다. 이는 기존 한국 미술사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걸 뜻해요. 저는 이 책을 통해서 한국의 미술사가 새로 쓰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인에게는 민화를 통한 치유가 필요

정병모 교수와 같은 학자의 연구와 노력으로 민화는 차츰 제 위상을 되찾아가고 있다. 민화 작가로 활동하거나 취미로 배우는 국내 인구가 10만 명을 넘었다. 주말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민화 작가가 나오기도 하며, 경매시장에서는 2천만 원으로 시작한 민화가 일억이 넘는 가격에 낙찰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민화는 굉장한 붐의 초입에 들어서 있습니다. 이미 미술시장과 대중문화가 민화 쪽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컬러의 시대이기에 수묵화만으로는 대중을 감동시키기 어려워졌습니다. 민화에 쓰인 밝고 명랑하며 한국적인 색채들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화의 색채는 서양화의 색채보다 우월한 측면이 많습니다. 민화에 쓰인 색채들은 화학약품 냄새가 나는 서양의 유화가 아닌, 자연재료로 구성되어 있죠. 그래서 정서를 편안하게 하고 건강에도 좋습니다. 최근 색채테라피가 인기를 끌고 있는데, 민화 역시 그 중심에 있습니다. 다채로운 색채에 상상력을 부여해 그리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창의력도 올라가지요.”

민화의 유쾌함과 치유의 효과가 더욱 빛나는 이유는 침울한 역사적 시기에 민화가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다.

민화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유행했다. 당시는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열강의 등쌀에 시달리다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에 의해 식민지 지배가 이루어진 시기다. 이러한 시기에 민화 화가들은 밝고 명랑한 그림으로 서민들의 고통과 애환을 달래주었다.

민화에는 어떤 형식이나 규범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이 환상처럼 펼쳐져 있다. 그리고 명랑한 흥취가 듬뿍 배어 있다. 이것은 민화 속에 흐르는 중요한 정서다. 구수한 가락을 들으면 어깨춤이 절로 나오고 한바탕 벌인 사물놀이를 보면 신명나듯이, 민화에는 서민의 흥취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저는 민화가 정서적인 균형을 잡아준다고 생각해요. 타클라마칸 사막, 땅에 풀 한 포기 안 나고 하늘에 나는 새도 없는 그 죽음의 땅에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위구르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노래와 춤을 굉장히 좋아해요. 척박함 속에서도 즐거움을 유지하게 하는 힘이 되는 거죠. 민화가 우리의 험난한 역사 속에서 긍정성을 찾게 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치는 현대사회에도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죠.”

민화가 새로운 한류를 이끌 것

<한국의 채색화>에 담긴 그림들은 뛰어난 색채감과 놀라운 디테일 그리고 무한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도자기의 윤택, 책걸이에 옻칠한 느낌과 나뭇결까지 섬세하게 묘사한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러한 그림들은 만사형통과 복을 기원하며, 출세, 다산, 부부간의 화목 등을 상징한다. 민화의 표현주의 속에는 동양의 철학이 함께 녹아 있다.

“일식집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우키요에 그림은 일본의 풍속화로 서민적인 그림입니다. 하지만 일본을 대표하는 그림으로 알려져 있고 세계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죠. 대중의 마음
을 사로잡는 문화가 그 나라를 대표하게 되어 있습니다. 대중적인 것 속에 감동이 있고 한국미술사에 있어 가장 대중적인 그림이 바로 민화입니다.”

민화의 세계화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2001년, 프랑스 파리의 기메동양박물관에서 ‘한국의 향수’라는 이름으로 민화 전시회가 열렸고,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는 2008년에 한국 회화사를 소개하며 민화의 책거리 그림을 다뤘다.

일본의 유명출판사인 헤이본사에서는 한국회화 전반을 다룬 ‘한국회화’라는 책 표지로 민화의 까치호랑이를 채택할 만큼, 민화를 한국의 대표적인 그림으로 인정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대학도서관을 대상으로 민화 기증운동을 펼치고 있고, 강연과 워크샵 등도 활발히 진행 중입니다. 미시건대학교에서 연 ‘민화축제’는 특히 큰 반향을 일으켰어요. 부채에 모란, 연꽃, 호랑이 등의 민화를 그리는 워크샵에 대학생과 교수는 물론 마을 주민들도 찾아왔어요. 올 가을에는 칠레의 산티아고카톨릭대학교에서 민화 강연과 워크샵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출간되는 명품도록인 <한국의 채색화>를 통해 한국의 그림이 세계인에게 더 널리 알려지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사제공 = 엠미디어(M MEDIA) 라메드 편집부(www.remede.net ), 취재 김수석 기자(kss@egihu.com), 촬영 권오경 사진기자
* 본 기사의 내용은 동아닷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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