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품질의 상향 평준화로 디자인은 브랜드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내·외관 디자인이 트렌드를 반영하지 못하면, 뛰어난 성능을 지닌 차량이라도 소비자의 외면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각 디자이너는 브랜드 정체성과 가치를 다양한 라인업에 창의적으로 전달할 디자인 작업에 몰두합니다. 자동차 업계를 대표하는 뛰어난 디자이너들은 이같은 고민을 어떻게 풀어내고 있을지 [자동차 디자人]을 통해 살펴봅니다.
자동차 디자인은 단순히 형태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금속과 유리, 빛과 공간을 활용해 브랜드 철학과 감성을 전달하는 작업이다. 최근 전기차 시대로 접어들면서 디자이너에게 주어진 공간 자유도는 커졌고, 그만큼 ‘무엇을 더할 것인가’라는 고민에 더해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결정도 중요해졌다.
중국 지리자동차 산하 프리미엄 전기차 브랜드 지커(Zeekr)에서 시니어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하는 황유지(Eileen Hwang) 디자이너는 이 질문에 대해 스웨덴식 철학인 ‘라곰(Lagom)’으로 답한다. 라곰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상태’를 뜻하는 스웨덴어다. 그는 라곰 철학을 바탕으로 균형의 미학을 빛으로 구현하는 디자인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스웨덴 예테보리에 위치한 지커 글로벌 디자인센터에서 황유지 디자이너를 만나 빛과 균형으로 완성한 그의 디자인 이야기를 들어봤다.
황유지 지커 시니어 인테리어 디자이너 / 출처=IT동아
순수 미술에서 자동차 디자인으로…진로를 바꾸게 만든 한 줄의 기사
그의 출발점은 자동차가 아니라 미술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했고, 공간 디자인에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황유지 디자이너는 “어릴 때부터 미술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며 화가 스튜디오에서 방과 후 인턴 겸 조수로 일한 경험도 있을 정도다. 이때 오일 페인팅을 배우며 순수 미술 작업을 즐기곤 했다. 동시에 학교에서 연극·공연 제작 수업을 들으면서 무대 디자인도 배웠다”며 “당시 뮤지컬 스토리에 맞는 공간을 구성하고, 조명과 구조를 고민하는 과정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지금 돌아보면 감성적인 회화 작업과 현실적인 공간 디자인을 동시에 좋아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스웨덴 예테보리 글로벌 디자인 센터에서 IT동아와 인터뷰 중인 황유지 디자이너 / 출처=IT동아
그는 이어 “대학 진학을 준비하던 시기에 자동차 디자인이라는 직업을 처음 알게 된 계기가 있었다. 어머니께서 보여주신 신문 기사 한 줄을 읽었는데, 한 한국 여성 디자이너가 해외 자동차 브랜드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여성은 GM ‘허머 HX 콘셉트카’를 디자인한 강민영 디자이너였는데, 그 모습에 매료됐다. 이때 처음으로 ‘자동차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알게 됐고 구체적으로 디자이너가 된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며 “강민영 디자이너가 미국 CCS(College for Creative Studies)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단순히 미술을 좋아하는 학생에서 자동차 디자이너라는 목표를 향해 준비하는 입시생으로 방향을 정했다. 어머니는 늘 세상은 넓고, 미술에도 다양한 길이 있다는 걸 보여주셨다. 어머니가 그 기사 한 줄을 건네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다른 길을 걷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디트로이트에서 배운 ‘디자이너의 기준’
황유지 디자이너는 자동차 디자이너를 꿈꾸게 한 강민영 디자이너의 뒤를 이어 미국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CCS에서 자동차 디자인을 전공했다. CCS는 자동차 디자인 분야에서 실무 중심 교육으로 명성을 얻은 학교다. 그는 CCS에서 공부했던 시간을 단순한 기술 습득을 넘어 자동차 디자이너로서의 기준과 태도를 배웠던 과정으로 회상했다.
황유지 디자이너는 “당시 CCS는 자동차 디자인 분야에서 이미 잘 알려진 학교였고, 실무 중심의 강도 높은 스튜디오 교육으로 유명했다. 입학 후 가장 놀랐던 점은 함께 공부하던 학생들의 수준이었다. 특히 한국에서 이미 디자인으로 유명한 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뒤, 자동차 디자인을 더 깊이 배우기 위해 CCS에 온 선배들이 많았다”며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처음으로 자동차를 그려봤기 때문에 선배들과 실력차가 아주 크게 느껴졌고, 솔직히 처음에는 기가 많이 죽기도 했다. 미국 대학이었지만, 전공 스튜디오에 들어가면 대다수가 한국 학생인 것 또한 흥미로웠다. ‘한국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온 느낌’ 같다는 농담이 나올 만큼 한국 학생들의 비중이 높았다. 담당 교수도 한국인이자 현직 GM 디자이너였다. 한국인이 자동차 디자인 분야에 강한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현장에서 직접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17년 당시 졸업작품을 발표한 황유지 디자이너의 모습 / 출처=황유지 디자이너
그는 이어 “이러한 환경이 오히려 자신을 더 단단하게 만든 계기였다. 선배들 실력의 절반이라도 따라가겠다는 마음으로 매일 스케치를 연습했고, 밤을 새우는 일이 일상이었다. CCS의 커리큘럼은 4년 안에 바로 실무에 투입 가능한 수준까지 실력을 끌어올리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과제의 양도 상당했다. 스튜디오에서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라며 “체력적으로 힘든 시간이었지만, 덕분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고 뛰어난 동료들과 치열한 환경 속에서 눈높이도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취업이 어렵겠다는 현실적인 감각도 생겼다. CCS에서의 시간은 단순한 기술 습득이 아니라, 자동차 디자이너로서의 기준과 태도를 배우는 과정이었다”고 전했다.
스웨덴에서 만난 디자인 철학, ‘라곰’
대학을 졸업한 그는 볼보트럭에 입사해 자동차 디자이너로 첫발을 내디뎠다. 스웨덴에서 거주하며 일한 경험은 그의 디자인 철학을 형성한 계기가 됐다.
황유지 디자이너는 “커리어를 스웨덴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과 환경이 디자인 철학 형성에 큰 영향을 줬다. 볼보트럭에서 일하던 시절, 저녁 6시가 넘어 스튜디오에 남아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디자인 디렉터가 혹시 일을 너무 많이 준 건 아니냐고 걱정의 말을 건넸던 기억이 난다. 그 순간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며 “스웨덴에서는 스튜디오에 오래 남아 있기보다는 밖으로 나가 여행하거나 전시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 삶을 경험하라는 조언을 자주 들었다. 디자인은 책상 위에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결국 삶에서 비롯된다는 가치관을 배웠다. 자연스럽게 ‘라곰(Lagom)’의 철학이 형성됐다. 흔히 라곰을 스웨덴의 철학이라고 하지만, 단순한 개념을 넘어 하나의 문화적 태도이자 가치관, 그리고 미학이라고 느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균형, 절제된 완성도를 뜻하는 라곰을 디자인에서도 늘 지키려고 한다. 무엇을 더하는 것보다 무엇을 덜어낼지를 고민하는 과정이 훨씬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볼보트럭 재직 당시 동료와 디자인 작업 중인 황유지 디자이너(오른쪽)의 모습 / 출처=황유지 디자이너
그는 이어 “볼보트럭에서 일하며 브랜드 미래 청사진인 전동화와 자율주행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이 인상 깊었다. 거대한 변화를 준비하는 볼보트럭의 내외관 디자인 업무에 참여하며 약 3년간 커리어를 이어갔다”며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의 전환은 자동차 디자인에 분명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구조적인 제약이 줄어들면서 디자이너들이 훨씬 자유롭게 공간과 비율을 실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디자인 작업을 하다보면, 센터 터널이 없는 구조를 시도하는 등, 패키징 자체를 새롭게 정의하려는 움직임을 마주한다. 지금은 하나의 정답을 찾기보다는, 다양한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실험해 보는 단계에 가깝다. 이런 실험들이 결국에는 브랜드 정체성과 사용자 경험 안에서 다시 정리되고, 균형을 찾게 될 것이다. 전기차는 단순히 형태를 바꾸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자동차를 바라보는 방식을 확장시키는 계기”라고 전했다.
볼보트럭 재직 당시 동료와 디자인 작업 중인 황유지 디자이너(왼쪽)의 모습 / 출처=황유지 디자이너
빛으로 구현한 균형, 링크앤코 프로젝트
볼보트럭에서 지리자동차와 볼보자동차의 합작 브랜드인 링크앤코(LYNK & CO)로 이직한 그는 본격적으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 커리어를 키워갔다.
황유지 디자이너는 “링크앤코와의 인연은 예테보리에 거주한 것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집 근처에 디자인 스튜디오가 있었기 때문에 유럽에 이제 막 론칭된 브랜드의 성장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흥미를 느꼈다. 특히 링크앤코 브랜드 방향성이 막 만들어지던 시점이라 성장하는 조직 안에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이었다. 링크앤코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합류한 이유”라며 “이후 다수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라이트 전략 수립에도 참여했다. 덕분에 인테리어에서 조명이 차지하는 역할을 깊이 고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황유지 디자이너가 작업한 링크앤코 02 인피니티 라이트 / 출처=링크앤코
링크앤코 02 차량에 적용된 인피니티 라이트 / 출처=링크앤코
그는 이어 “지금까지 다섯 개 차량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가장 애착이 가는 작업물은 링크앤코 02다. 당시 콘셉트 스케치 단계에서 상상했던 ‘인피니티 라이트(Infinity Light)’ 효과를 실제 차량 내부에 구현하기까지 2년이 넘는 프로토타입 실험을 진행했다. 팀과 협력사 모두 처음 시도해 보는 기술이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지만, 그 과정 자체가 도전이었고 즐기며 임했다”며 “특히 2024년 밀라노에서 차량을 직접 런칭하기 위해 무대에 섰던 잊지 못할 순간도 떠오른다. 아이디어로 시작했던 빛의 효과가 실제 차량에 나타나 관객 앞에 공개되는 장면을 보며, 긴 시간 실험과 고민이 보상받는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인피니티 라이트를 소개하는 황유지 디자이너 / 출처=황유지 디자이너
링크앤코 02 밀라노 론칭쇼 현장에서 차량을 소개하는 황유지 디자이너 / 출처=황유지 디자이너
링크앤코 02 / 출처=링크앤코
디자인 작업은 한 사람의 아이디어로 완성되지 않는다. 제품 기획, 엔지니어링, 협력사 등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히는 과정에서 수많은 의견 충돌이 발생한다. 황유지 디자이너는 이런 상황을 갈등이 아닌 ‘조율의 과정’으로 바라본다. 서로 다른 가치와 목표를 가진 조직이 대화를 통해 접점을 찾아갈 때, 오히려 더 완성도 높은 결과가 나온다는 믿음이다.
황유지 디자이너는 “디자인 철학이 충돌하는 상황은 더 나은 결과를 위한 조율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다를 뿐, 많은 대화와 이해관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접점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며 “일례로 링크앤코에서 담당한 첫 프로덕션 차량인 링크앤코 08 프로젝트가 떠오른다. 당시 하만카돈(Harman Kardon) 독일 디자인팀과 차 스피커 디자인을 두고 긴밀하게 협업을 진행했다. 하만카돈팀은 자신들만의 패턴과 그래픽 요소를 인테리어에 반영하기를 원했고, 링크앤코 역시 브랜드 캐릭터가 분명히 드러나길 원했다. 초기에는 방향성 차이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양측은 다양한 시안을 함께 실험하며, 서로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집중했다”고 말했다.
링크앤코 08 프로젝트 디자인 스케치 / 출처=황유지 디자이너
링크앤코 08 차량 실내에 적용된 하만카돈 스피커 디자인 / 출처=링크앤코
링크앤코 08 차량 실내에 적용된 하만카돈 스피커 디자인 / 출처=링크앤코
그는 이어 “기존 패턴을 변형하는 방법, 조명과 결합했을 때 새로운 표현 가능성 등 다양한 시안을 함께 실험하며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검토를 거듭했다. 이처럼 서로의 의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자 의견 차이를 좁히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어느 한쪽이 과하게 드러나거나 묻히지 않는 균형점을 찾아냈다”며 “그 결과 링크앤코만의 고유한 하만카돈 패턴이 탄생했고, 하만카돈 역시 자동차 실내에서 백라이트 스피커를 그래픽 요소로 적극 활용한 새로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두 브랜드 정체성을 모두 살린 사례로 평가받으며,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수상으로도 이어졌다. 감동적인 순간으로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링크앤코 08 / 출처=링크앤코
디자인은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물…“기사 한 줄이 누군가의 꿈이 되기를”
끝으로 자동차 디자이너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제언을 부탁했다.
황유지 디자이너는 “자동차 디자인 작업을 하다 보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다. 디자인 실력만큼이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결국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든다고 믿는다”며 “프로젝트를 진행할수록 혼자 잘하는 것보다 함께 잘하는 게 훨씬 어렵고, 또 훨씬 중요하다는 걸 점점 더 실감한다. 디자인을 하면서도 친절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다. 의견이 다를 때도 웃으면서 토론할 수 있는 여유와 자기 생각을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가 결국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스웨덴 예테보리 글로벌 디자인 센터에서 IT동아와 인터뷰 중인 황유지 디자이너 / 출처=IT동아
그는 이어 “평소 무드보드 이미지나 다양한 레퍼런스를 참고하기도 하지만, 직접 보고 느끼는 경험에서 더 큰 영감을 받곤 한다. 전시를 보고 공간을 걸어 다니며 재료를 만져보고, 빛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관찰하는 순간들이 기억에 더 오래 남는다. 각종 전시회에서 마주하는 신기술 프로토타입도 흥미로운 영감의 원천이다. 새로운 소재나 조명 방식이 실제로 어떻게 구현되는지 현장에서 확인하는 과정은 자동차 디자인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직접 찍는 사진도 중요한 원천이다. 여행하거나, 일상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들을 기록해 두고, 시간이 지난 뒤 다시 꺼내보며 새로운 아이디어로 발전시키기도 한다”며 “이처럼 영감은 특정한 한 곳에서 오는 게 아니라, 일상의 모든 경험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직접적인 경험을 하기 바란다. 신문 기사 한 줄로 자동차 디자인이라는 직업을 처음 알게 됐고, 그 작은 계기가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다. 예전에 내가 그랬듯 누군가 이 기사 한 줄로 디자이너라는 꿈을 품고 발걸음을 내딛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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