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를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는 순간, 소품[허명현의 클래식이 뭐라고]

  • 동아일보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작곡가는 언제 가장 솔직해질까. 대개 우리는 작곡가의 진심이 거대한 작품 속에 담겨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교향곡, 오페라, 대규모 소나타 같은 대표작들이 그렇다. 음악사에 이름을 남긴 작품들이다. 하지만 곰곰이 음악을 듣다 보면, 오히려 그 반대라는 생각이 든다. 작곡가의 목소리가 가장 또렷하게 들리는 순간은 가장 크게 말할 때가 아니라 가장 작게 말할 때다. 수백 명의 연주자와 거대한 구조를 동원하는 교향곡이 아니라, 몇 분 남짓한 소품에서다. 그 작은 형식 안에서 우리는 음악이 아니라 사람을 먼저 만나게 된다.

대작에는 대개 목적이 있다. 시대의 작품들과 경쟁해야 하고, 청중과 평단의 비평을 의식해야 한다. 때로는 작곡가 자신의 야심까지 담아야 한다. 작품은 완결되어야 하고, 구조는 설득력을 가져야 하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이 작품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말해주어야 한다. 그 안에서 작곡가는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고, 다듬고, 음악적으로 설명한다. 진심이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 진심은 이미 한 차례 정돈된 형태로 제시된다.

반면 소품은 대체로 짧고, 작고, 부차적인 작품으로 취급된다. 프로그램의 중심이 되기보다는 사이에 끼어 있고, 앙코르로 연주되거나 음반의 마지막 트랙에 놓이기 쉽다. 하지만 여기서 소품의 본질이 드러난다. 오히려 소품은 무언가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음악이다. 작곡가가 자신의 위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반드시 음악사적 의미를 확보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다. 이 자리에서는 실패보다 솔직함이 더 중요해진다.

그래서 소품에서는 작곡가가 설명하려는 태도가 한발 물러난다. 감정을 서사로 길게 풀어내지 않고, 구조를 통해 설득하려 하지도 않는다. 어떤 선율은 짧게 스쳐 지나가고, 어떤 화성은 굳이 강조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음악은 도착해야 할 목적지를 구체적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대신 지금, 이 순간의 감정만 담아낸다. 이 음악들은 결론이라기보다 하나의 장면처럼 들리고, 독백에 가까운 어조로 다가온다. 그 응축된 밀도와 여백이야말로 소품이 지닌 고유한 완결성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짧은 음악들이 유난히 사람의 말처럼 들린다는 점이다. 대작에서는 음악이 나아가야 할 길이 비교적 분명하다. 시작이 있고, 거쳐야 할 지점이 있으며 도착해야 할 결론이 있다. 하지만 소품은 그렇지 않다. 감정은 꼭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도 되고 어느 방향으로 정리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머물러도 된다. 작곡가는 이 순간에 무엇을 주장하기보다 굳이 결론을 정하지 않은 채 그 감정을 그대로 두는 쪽을 택하기도 한다. 그 머뭇거림이야말로 누군가의 마음이 실제로 움직이는 방식에 더 가깝다. 정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현실에 가까운 것이다.

이것은 결핍이 아니라 선택이다. 소품에서는 음악이 나아가야 할 길을 미리 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침묵과 여백이 생긴다. 작곡가는 이 여백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음악은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고 일부러 다음으로 나아가지 않은 채 머문다. 소품이 유독 개인적인 경험으로 남는 이유는 음악이 하나의 길이나 의미를 강요하지 않고 각자의 감각이 머물 자리를 열어두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교향곡에서의 브람스가 감정의 방향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작곡가라면, 그의 피아노 작품 중 간주곡은 작곡가가 무엇을 굳이 분명히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는다. 이 음악들은 감정을 정리하거나 규정하지 않는다. 기쁨도 슬픔도 하나의 이름으로 묶이지 않고, 그 사이 어딘가에 머문다. 음악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같은 자리에 잠시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작곡가를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는 순간이 그들의 가장 작은 작품을 들을 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름이 덜 알려진 곡, 프로그램 노트 한 줄로만 소개되는 작품, 혹은 제목조차 소박한 음악들 속에서 작곡가는 오히려 가장 자신답다. 꾸미지 않고, 주장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어쩌면 작곡가의 진심은 무엇을 말했느냐보다 어디에서 말을 멈추었느냐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소품은 바로 그 멈춘 지점을 고스란히 남겨 둔 음악이다. 그러니까 대작이 무대 위의 모습이라면, 소품은 무대 뒤에서 드러나는 평소의 움직임이다. 크게 남기기 위해 쓰인 음악이 아니라 그냥 남아버린 음악. 그래서 더 솔직하고, 더 사적이며,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작곡가는 바로 그 작고 조용한 순간에 가장 솔직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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