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의 한 장면. 서로 다른 거리감 속에서 마주 선 두 인물이 회피형·안정형 관계의 심리적 대비를 보여준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는 ‘회피형 여자와 안정형 남자의 사랑’이라는 설정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여주인공 차무희(고윤정 분)는 겉으로는 당차고 화려한 톱스타이지만, 내면에는 공포형 회피(Fearful Avoidant) 성향을 지닌 복합적인 캐릭터다. 극이 진행되며 그는 남주인공 다중언어 통역사 주호진(김선호 분)의 해독(Decode)에 가까운 포용을 통해, 상처를 숨기는 법이 아닌 상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관계를 맺는 법을 배워간다.
사랑에 가까워질수록 뒤로 한 걸음 물러서는 인물. 사랑받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온기가 가까워지면 버려질 것에 대한 공포 때문에 연인을 밀어내는 이 모습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 보호적 거리두기’의 전형이다.
● 회피형은 ‘사랑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는 회피형 애착을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관계를 너무 잘하고 싶어서 오히려 피하게 되는 상태”라고 설명한다. 겉으로는 무심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대의 평가와 거절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커질수록 감정 표현을 줄이고 침묵이나 거리 두기를 선택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미국심리학회(APA)는 이를 “정서적 친밀함에 불편함을 느끼고, 독립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경향”으로 정의한다. 임상적으로는 이들이 관계에서 감정 표현을 최소화하고, 갈등 상황에서 단절을 선택하는 패턴이 자주 관찰된다.
즉, 이들에게 독립은 단순한 성향이나 취향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상처를 피하기 위해 형성된 심리적 생존 전략에 가깝다.
● 왜 가까워질수록 밀어낼까: ‘거절’의 기억이 만든 성벽
애착 이론의 창시자 존 볼비(John Bowlby)는 회피형 애착이 어린 시절의 거절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도움을 요청했을 때 외면당하거나, 감정 표현이 무시됐던 아이는 “의지하면 반드시 상처받는다”는 내부 규칙을 세운다. 성인이 된 이들에게 사랑은 ‘안식’이 아니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성’이다. 그래서 관계가 깊어질수록 이들은 사랑을 느끼는 동시에 ‘상실의 공포’를 함께 느낀다.
임 교수는 이를 “평가에 대한 두려움”으로 설명한다. 그는 “회피형 애착을 보이는 사람들은 잘해서 얻는 이익보다, 혹시라도 잘못해서 받을 상처가 더 두려워서 차라리 피하는 쪽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 패턴이 발표 불안이나 수행 불안과 유사한 심리 구조를 갖는다고 덧붙였다.
● 안정형과 만나면 왜 더 충돌할까: ‘친밀감의 온도차’
안정형은 친밀감을 편안한 상호작용으로 보지만, 회피형은 이를 ‘자아의 침범’으로 느낀다.
안정형은 “왜 더 다가오지 않니?”라며 손을 뻗고, 회피형은 “왜 내 영역을 침범하니?”라며 뒷걸음질 친다.
이 엇갈림은 한쪽이 나빠서가 아니라, 서로의 ‘안전 거리’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임 교수는 회피형이 친밀감이 깊어질수록 불안을 느껴 무의식적으로 이별을 유도하기도 한다고 분석했다. 오히려 이별이 예측 가능한 상태가 되면 심리적으로 더 편안해지는 역설적인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 회피형은 고장 난 성격일까: ‘변화의 가능성’
최근의 임상심리학 연구들은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애착 스타일은 고정된 화석이 아니라, 관계 경험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심리적 지도’에 가깝다. 대규모 종단 연구에 따르면, 안정적이고 지지적인 파트너와의 반복된 경험은 회피 성향을 완화시킬 수 있으며, 삶의 사건들은 애착 스타일에 장단기적 변화를 불러온다.
넷플릭스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의 한 장면. 서로 다른 거리감 속에서 마주 선 두 인물이 회피형·안정형 관계의 심리적 대비를 보여준다.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 속 무희가 호진을 통해 변하듯, 현실에서도 ‘안전한 타인’과의 상호작용은 뇌의 보상 체계를 재구조화할 수 있다.
● 회피형, 그들의 침묵은 ‘평화’가 아니다
드라마 속 회피형은 흔히 ‘나쁜 남자·여자’의 매력으로 미화되지만, 실제 그들의 내면은 전쟁터다. 임상 현장에서 회피형은 오히려 높은 스트레스와 정서적 피로를 겪는 집단이다. 전문가들은 이들의 관계가 보완적일 수 있지만, ‘인내심 있는 통역’ 없이는 유지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임 교수는 회피형과 관계를 맺는 상대에게는 “기다림의 속도 조절”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상대가 너무 적극적으로 다가가면 회피형들은 도망가는 경우가 많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상대의 과거 이별 경험이나 상처를 조심스럽게 탐색하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관계의 작동 방식을 재학습하기 위해 전문가들은 다음 세 가지를 권고한다.
△ 감정의 언어화: 막연한 불안을 구체적인 단어로 표현하기. △ 단절 대신 ‘타임아웃’: 무단이탈 대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함을 예고하기. △ 패턴의 인식: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상대 때문인지, 자신의 기억 때문인지 구분하기.
넷플릭스 ‘이 사랑 통역 되나요?’ 장면. 회피형 애착과 안정형 파트너의 관계 패턴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했다. 넷플릭스 제공
● 결론: ‘문제’가 아닌 ‘문법’의 차이
심리학에서 회피형 애착은 누군가를 덜 사랑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랑을 전하는 ‘문법’이 서툰 상태에 가깝다. 사랑이 없어서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너무 커서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의 과부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무의식적 기제인 셈이다.
김현수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회피형 성향의 사람들은 갑작스럽고 강렬한 감정적 밀착을 위협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다”며, 이들과의 관계에서는 ‘천천히 스며드는 거리감’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상대가 이성과 감정의 균형을 유지한 채 자신의 일을 잘 해내고, 스스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회피형에게는 강력한 신뢰의 신호가 된다”며, 상대에게 과도하게 몰입하기보다 각자의 삶을 건강하게 지켜내는 것이, 오히려 그들이 안심하고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광장을 만들어 주는 길이라고 조언했다.
임 교수는 관계의 핵심을 “애정보다 친밀감”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회피형이든 안정형이든 중요한 것은 감정을 표현하고, 옆에 함께 있어 주는 경험”이라며 “사랑은 종종 열정이 아니라 ‘친구처럼 남아 있는 능력’에 가깝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옆에 남아 주는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오래 지속되는 관계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결국, 누군가의 회피를 멈추게 하는 것은 억지로 끌어당기는 힘이 아니라, 그가 언제든 돌아와 쉴 수 있도록 그 자리에 변함없이 서 있는 ‘건강한 거리’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상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지도를 함께 읽어주는 일이다.
■ 1분 애착 유형 테스트 다음 중 자주 해당된다고 느끼는 문항을 체크해 보세요. A: 사랑을 확인받고 싶고, 상대의 작은 기분 변화에도 자주 신경이 쓰인다. B: 가까워지면 답답함을 느끼며, 속마음을 털어놓기보다 혼자가 편한 편이다.
[결과 확인] 안정형 (A·B 모두 낮음): 친밀감과 독립성을 비교적 균형 있게 유지하는 경향 불안형 (A 높음): 관계에 대한 몰입과 확인 욕구가 강한 경향 거부적 회피형 (B 높음): 관계보다 자율성을 중시하며 갈등 시 거리를 두는 경향 공포형 회피형 (A·B 모두 높음): 상처받을 가능성을 느끼면 먼저 물러나는 ‘자기 보호’ 경향
※ 이 테스트는 임상 진단이 아닌, 애착 성향을 이해하기 위한 참고용입니다.
참고문헌 (핵심 요약 및 링크) 애착 스타일은 변한다 (2021): 4,000명 이상을 대상으로 한 장기 추적 연구 결과, 실직이나 이별 같은 삶의 사건들이 애착 유형을 일시적 혹은 영구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이 확인되었다. 관련 링크 (PubMed)
고정된 화석이 아니다 (2019): 성인 애착이 어린 시절 경험의 영향을 받긴 하지만, 완전히 고정된 것은 아니며 이후의 관계 경험에 따라 유동적으로 발달한다는 사실을 정리했다. 관련 링크 (ScienceDir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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