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도 유전된다" 모방자이론 등장 뜨거운 논란

  • 입력 2000년 10월 18일 18시 44분


문화도 유전된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최근 생물학자와 심리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들고 나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 이론의 핵심 개념은 ‘모방자(MEME, 밈)’이다. 흉내(MIMETICS)의 약자인 모방자는 최근 옥스퍼드영어사전에도 등장할 만큼 유명한 단어가 됐다. 이 이론을 만든 과학자들은 원숭이에 불과했던 인류가 사람으로 진화한 원동력은 흉내내기였으며, 인간의 두뇌는 흉내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모방자란 단어를 처음 만든 사람은 ‘이기적 유전자’란 책으로 유명한 영국 옥스퍼드대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 도킨스는 1976년에 펴낸 이 책에서 생명체의 복제기구가 유전자(GENE)인 것처럼, 모방자는 문화를 복제해낸다고 주장했다.

이기적 유전자 이론은 생명체를 유전자의 운반체로 본다. 즉 유전자는 생명체의 안녕과 행복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유전자를 만들어내고 퍼뜨리기 위한 수단으로 생명체를 이용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문화를 전파하고 진화시키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모방자라는 것이 도킨스의 가설이다. 모방자는 신념 사고 아이디어 슬로건 선율 행동 언어 등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파되는 모든 문화 요소를 일컫는다.

90년대 후반 많은 과학자들은 ‘다윈의 위험한 아이디어’ ‘마음의 바이러스’ ‘생각의 감염’ 등의 책을 펴내면서 도킨스의 모방자 개념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영국 웨스트잉글랜드대 심리학자인 수전 블랙모어가 ‘밈 머쉰’이란 책을 펴내면서 뜨거운 논란거리로 등장했다.

블랙모어는 왜 인간의 두뇌는 유별나게 큰지, 다른 동물과 달리 왜 인간한테는 생존에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음악, 예술 등의 문화가 그처럼 중요한지도 모방자 이론이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뇌는 몸무게에 대한 비율로 볼 때 진화상 가장 가까운 동물인 원숭이에 비해서도 3배나 크다. 뇌 크기 때문에 많은 산모와 아기가 출산 때 죽는다. 왜 진화는 이처럼 위험을 감수하면서 뇌의 크기를 늘렸을까?

지금까지 진화학자들은 인간이사회적 동물로 발전하면서 두뇌가 커졌다고 보아왔다. 채취나 수렵 을 위해 협력하는 복잡한 사회적 기술을 터득하는 과정에서 머리가 커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방자 이론가인 블랙모어는 수백만 년 전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점프를 하는 데 흉내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고 주장한다. 사람의 흉내내기는 침팬지가 개미를 잡아먹는 행동과는 비교가 안되게 복잡하다. 복잡한 흉내내기를 위해서는 큰 저장용량과 빠른 정보처리 능력을 필요로 했고 이것이 두뇌가 폭발적으로 커지게 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버섯을 일단 먹어보고 독이 있는지 없는지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것보다 앞서서 먹고 살아난 사람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이처럼 생존 가치가 큰 행동을 잘 선택해 모방하는 사람이 생존율도 높았고, 더 많은 자손을 남겼다.

또 다른 사람이 내는 소리를 더 잘 흉내내 언어 소통을 잘 하는 사람이 살아남으면서 언어가 발달했다. 수백만 년에 걸친 인류의 진화 역사는 흉내를 잘 내는 유전자가 계속해서 이긴 역사였다는 것이다.

블랙모어는 모방자도 유전자처럼 사람에서 사람으로 복제되고, 잘못된 흉내를 통해 변이가 생기며, 생존가치가 높은 것이 선택된다고 말한다. 진화의 3대 특징인 복제, 돌연변이, 자연선택이 흉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유전자와 모방자 그리고 이를 에워싼 환경이 진화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모방자 이론가들은 우리의 마음이 모방자의 지배를 받는다고 본다. 다른 사람에게서 복제해온 많은 모방자들이 모여 마음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블랙모어는 우리의 자의식이나 자유의지를 수백만 개의 모방자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환상으로 본다.

모방자 이론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저명한 진화생물학자인 미국 하버드대 스테븐 제이 굴드는 이를 ‘의미 없는 은유’라고 반박한다. 또한 일부 철학자는 인간을 단지 유전자와 모방자의 운반체로 보는 극단적 다윈주의는 자아 개념에 혼란을 일으키고 영혼과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해 도덕적 황폐화를 부를 수 있다고 우려한다.

<신동호 동아사이언스기자>do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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