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로 정나누는 父女]아빠의 삐삐詩덕분 상쾌한 하루

  • 입력 1997년 7월 1일 08시 08분


「너의 삐삐 속에선 일단 음악소리가 들린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네작은 음악회에 초대되고 잠시 눈을 감는다 자기를 찾는 누군가에게 무엇보다 먼저 음악을 선물할 줄 아는 사람의 마음은 평화롭고 선량하리라」. 수업시간에 울린 삐삐의 진동음. 나중에 메시지를 들어보니 역시나 아버지다. 인사말 대신 그저 요즘 유행하는 가요를 녹음해놨을 뿐인데 음악을 선물받았다고 얘기해주는 아버지가 고맙다.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걱정하고 믿어준다는 게 힘이 돼요. 물론 아빠의 시도 좋구요』 나경이(서울 예일여고 3년)는 아버지 이재호씨(48·남광 엔지니어링 부장)가 보내주는 「사랑의 삐삐시」 덕분에 따뜻한 하루를 보낸다. 1년의 대부분을 지방 건설현장에 내려가 있는 이씨가 딸에게 삐삐를 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가을. 처음엔 「빨리 집에 안 들어오고 뭐하냐」 「엄마가 할아버지댁 가셨을 때 혼자서도 잘 해먹고 다녀라」는 식의 걱정과 잔소리가 전부였다. 그러다 시집도 두 권 낸 시인아버지가 남들과 똑같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어느날부턴가 매일 한두편씩 자작시를 녹음했다. 「공부 열심히 해라」는 얘기는 짜증만 나게 할까봐 쏙 뺐다. 「희망이란 가장 원대하고 눈부신 아름다움과 눈 맞추는 일이다. 너와, 네가 가진 젊음과, 네 인생이 풋풋한 희망 덩어리이길 바래」. 「혼자서는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내 그리움의 눈높이를 넘어서 자꾸자꾸 차오르는 만조처럼 너 보고픔을 주체할 수 없을 때 난 아무데나 털썩 주저앉는다」. 이씨는 현장체크 수첩에 틈틈이 몇 줄씩 적어놓았다가 전화기만 보면 달려가 삐삐를 쳤다. 당시 엄습하던 권고사직의 불안감도 딸에게 보내는 사랑의 시로 달랬다. 딸만 편애한다고 할까봐 아내와 대학교 2학년인 아들에게는 「고3이 가장 스트레스도 많고 감수성도 예민할 때 아니냐」며 양해를 구했다. 글재주가 있는 딸에게 생생한 시공부를 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나경이는 좋은 시는 꼭 저장해 놓았다가 일기장에 옮겨적었다. 털털하고 친구 많고 어수선한 것까지 아버지를 빼닮은 나경이. 아버지가 모처럼 집에 있는 날이면 포장마차나 감자국집에 따라가 도란도란 얘기를 주고받다 온다. 『인생 자체가 기나긴 시험이야. 충만한 사랑을 하면서 열심히 살자. 진정으로 꿈꾸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거지』 딸의 삐삐에 시를 남기고 직접 그린 엽서나 문학잡지를 학교로 부쳐주기도 하는 낭만적인 아버지. 내년에 나경이가 대학에 가면 책도 한 보따리 사주고 맥주잔도 같이 기울이고 싶은 것이 그의 꿈이다. 〈윤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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