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호 칼럼]민주주의의 기능과 한계

  • 입력 2009년 9월 3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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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와 북한의 갑작스러운 유화 제스처, 야당의 등원 결정, 정부 개편 관련 기사, 일본 민주당의 역사적 압승, 거기에 개헌 논의까지 겹치며 8월 말 언론의 정치면은 현란했다. 우리도 누적된 정치 피로증에서 해방되어 생업에 몰두할 날이 가까워 오는가, 아니면 정치난맥상이 고질이 되어 국가경쟁력 추락에 부채질을 할 것인가.

50년 넘게 나라를 이끌어온 자민당 세력을 선거로 무너뜨리며 차분히 새로운 도약을 다짐하는 일본과 작고한 정치인에 대한 추모 열기가 우리의 국장을 무색하게 하며 온 국민을 하나로 결집하는 듯한 미국의 정치 풍경을 바라보며 우리 정치는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간 자부해 왔듯이 우리가 선거를 통해 몇 번의 정권교체를 이뤄 내며 민주화에 성공했다면 이제 정치는 안정되고 일반 국민은 각자 생업에 몰두할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민주주의란 무엇이고 왜 그것을 그리도 갈구했는가? 군사독재 타도라는 소극적 정의가 필요하고 가능했을 때 민주화라는 구호 아래 대중을 결집하는 일은 명분상 간단했다. 그러나 자유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부에 대해 불만이 고조될 때, 그리고 언제고 불만은 없을 수가 없는데 그때도 반독재를 외치는 것으로 나라를 발전시키고 민주주의를 확충할 수 있나?

국민이 생업에 전념토록 하려면

민주주의란 사실 평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이 모두 정책 결정 과정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보장하고 서로 다른 입장을 절충해 타협을 이끌어 내는 가장 비폭력적인 방법일 뿐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제도뿐 아니라 그 나라가 가진 총체적 인적 물적 역량과 그 역량을 효율적으로 가동시켜 활용해 나가는 지혜와 도덕적 용기이지 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아니다. 삶의 질이 가장 높기로 정평이 나 있는 나라 중에는 아직도 입헌왕정 체제를 고수하는 경우가 많다. 대중민주주의는 히틀러의 추악한 독재를 낳을 수도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 정치가 헛도는 것은 상당부분 민주주의에 대한 과잉 기대와 그것을 획책하는 일부 정치인의 위선적 인기영합주의 때문이 아닌가 한다.

민주주의를 가장 잘 요약한 표현으로는 링컨의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의 말미에 나오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를 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크게 갈린다.

‘국민의 정부’란 물론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뜻이고 주인은 언제나 권리와 책임을 함께 지닌다. ‘국민에 의한’ 정치의 대표적 표현은 선거를 통한 정치참여이다. 주권자인 국민은 주인의식을 갖고 선거에 참여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게 된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못마땅한 결과가 나왔다 하더라도 투표 결과에 불복한다는 것은 민주국가에서 국민주권을 침해하는 자해행위요 용납할 수 없는 폭력이다. 그 때문에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 대한 모독은 국민주권에 대한 침해로 간주되어 정파 간 차이에 상관없이 배격하는 것이 정상이다.

도시국가 규모를 벗어나 정치 단위가 커질 경우 대의제는 불가피하며 모든 국민이 다 중요한 정치직이나 행정직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다. ‘국민에 의한’이라는 표현이 ‘국민 모두가 대통령’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 ‘국민에 의한’ 정부라는 표현은 ‘국민을 위한’이라는 조항과 연계해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분야별 엘리트의 발탁 활용은 민주주의와 상치되지 않고 오히려 필요요건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국가정책을 펴나가는 일에서 가장 공공의식이 투철하고 능력이 탁월한 사람을 공직자로 발탁해 활용하지 않는다면 ‘국민을 위한’ 최선의 정책을 폈다고 할 수 없다.

정치적 안배 대신 최고 엘리트를

공직이 마치 먹을 자리인 듯 객관적으로 입증된 자격보다 정치적 안배부터 생각하는 이른바 코드인사 또는 위인설관의 관행이 오히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만연하게 된 것은 ‘국민을 위한’이라는 조항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잘못 해석한 데서 오는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국가자산을 투자하는 일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아니고 정치적 안배를 구실로 차선의 인물을 선택함으로써 안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치자. 그것이 국민을 위한 일이었다고 변명할 여지가 있겠는가.

중국의 공산당이나 옛 소련 공산당의 가장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가 엘리트의 관리와 활용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일본의 지도자로 부상한 하토야마 유키오와 오자와 이치로도 경륜과 사회경제적 입지로 볼 때 최고 엘리트의 요건을 갖춘 사람들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인호 KAIST 김보정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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