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59>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9월 16일 18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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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며칠 뒤 한왕 유방이 역양((력,역)陽)에 이르러 보니 성안은 두어 달 전 새왕(塞王) 사마흔으로부터 항복을 받을 때와는 딴판이 되어 있었다. 성곽과 궁실(宮室)은 그새 새로 지은 듯 깨끗이 수축되어 있었으며, 거리도 전란의 시대 같지 않게 조용하고 가지런했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전보다 훨씬 늘어난 듯한 성안 백성들도 활기에 차 있었다. 모두 승상부를 파촉(巴蜀)에서 그리로 옮긴 승상 소하가 한 달 만에 바꾸어 놓은 역양의 모습이었다.

“폐구(廢丘)는 옹왕(雍王)의 도읍이었고 관중의 요충에 자리 잡은 땅입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우리 한군(漢軍)의 수공(水攻)을 당해 그 성은 허물어진 곳이 많고 백성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대왕의 도읍으로 삼기에는 마땅치 못했습니다. 또 함양(咸陽)은 진나라의 도성으로 오래 번성하였지만, 이제는 땅기운이 다해 새로 일어나는 우리 한나라의 운세를 감당해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비해 역양은 비록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끼고 있지는 않았으나, 잠시 행궁(行宮)이 머무르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땅입니다. 새왕 사마흔이 싸움 없이 항복한 덕분에 성 안팎이 온전하면서도, 적왕(翟王) 동예의 도읍이었던 고노(高奴)처럼 궁벽하지도 않으니, 한동안은 이곳을 우리 대한(大漢)의 도읍 삼아 썼으면 어떻겠습니까?”

새로 마련한 왕궁에서 한왕을 맞은 소하는 그렇게 물어 역양을 도읍으로 정한 까닭을 밝히는 것에 대신했다. 모든 일에 빈틈없는 소하가 정한 일이라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만 있던 한왕이 문득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렇지만 함곡관에서 너무 가까워 지키기에 어렵지 않겠소?”

“깊숙이 들어앉아 지키려고만 한다면 파촉이나 남정(南鄭)이 훨씬 더 좋은 도읍이겠지요.”

소하가 그렇게 말하고는 한왕을 달래듯 이었다.

“그렇지만 대왕께서는 곧 관외(關外)로 나가 중원(中原)의 사슴을 쫓으실 분입니다. 그때 관중에서 군사와 물자를 거두어 대왕의 뒤를 대기에는 함곡관에서 가까운 이 역양이 더 나을 듯합니다.”

그러자 슬며시 장난기가 인 한왕이 갑자기 소하를 나무라듯 말했다.

“승상은 전에 나를 파촉 한중으로 몰아넣지 못해 성화더니, 이제는 또 관외로 밀어내지 못해 안달이구려. 도읍을 어찌 당장 다스려야 할 땅을 보아 정하지 않고 멀리 나가 싸울 때를 위해 정한단 말이오?”

“신이 대왕께 파촉 한중으로 들기를 권한 것도 다시 관외로 나가 천하를 다툴 밑천을 장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삼진(三秦)까지 거두시어 밑천이 든든해지셨으니, 대왕께서는 마땅히 관외로 나아가 천하를 도모할 때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일이 일찍이 신이 헤아린 대로 되어가고 있는데, 어찌하여 대왕께서는 신을 한결같지 않다고 몰아대십니까?”

소하는 한번 웃는 법도 없이 그렇게 받고는 다시 덧붙였다.

“도읍을 옮긴다는 것은 나라를 옮기는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조정(朝廷)을 열 궁실을 마련해야 하며, 종묘(宗廟)를 옮기고 사직(社稷)을 새로 세워야 합니다. 새 도읍에 맞게 법령과 규약을 고치고, 현읍(縣邑)을 다스릴 제도도 다시 정비해야 하며…….”

소하가 그렇게 끝없이 할일을 늘어놓으며 복잡한 문서와 도적(圖籍)까지 꺼내자 그런 일에 밝지 못한 한왕은 이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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