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58>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9월 15일 18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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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왕 유방도 장량과 뜻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수들을 달래 그대로 대군을 낙양에 머무르게 한 채 가만히 사람을 팽성에 들여보내 항왕의 움직임을 살펴보게 했다. 오래잖아 세작(細作)으로 갔던 자가 돌아와 알렸다.

“지난달 항왕은 제왕(齊王) 전영과 조나라를 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켰으나, 대왕께서 함곡관을 나오셨다는 말을 듣고 출발을 미루었다 합니다. 그러다가 하남왕 신양과 한왕 정창이 모두 대왕께 항복했다는 말을 듣자 이제는 서쪽으로 군사를 낼 채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실제로 적지 않은 군사가 팽성 서쪽에 모여 먼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음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고 왔습니다.”

한왕은 그 말에 홍문의 잔치가 떠오르며 절로 간이 떨려왔다. 아직은 패왕 항우의 그 엄청난 위세와 패기를 정면으로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적어도 그 불같은 예봉(銳鋒)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는 한왕 유방에게도 군주로서 지켜야 할 위엄과 품위가 있었다.

“옛말에 이르기를 만족할 줄 알면 위태로움이 없다(知足不殆) 하였소. 지난 8월 고도현(故道縣)의 옛길로 한중(漢中)을 빠져나온 이래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것을 얻었소. 멍석 말 듯 삼진(三秦)으로 밀고든 지 두 달도 안돼 세 왕을 모두 죽이거나 사로잡고, 드넓은 관중평야를 다 차지했소. 그리고 다시 동쪽으로 함곡관을 나온 뒤 이제 겨우 한달 남짓, 우리는 하남(河南)과 한(韓)나라를 평정하고 그 왕 신양과 정창의 항복을 받아내 위엄을 천하에 떨쳤소. 이만하면 만족해도 될듯하오. 거기다가 우리 장졸은 이제 지쳤고, 그들을 먹일 곡식과 싸움에 쓸 물자도 다해가오. 더하여 날은 차고 땅은 얼어붙어 대군이 행군하기에도 마땅치 않으니, 여기서 이만 물러나는 게 어떻겠소? 관중으로 돌아가 기력을 회복하고 곡식과 물자를 넉넉히 장만하였다가, 날이 풀리는 대로 다시 나오는 게 군사를 부리는 순리일 것이오.”

그렇게 팽성과 항왕의 말을 쑥 빼고 장수들을 달랬다. 대장군 한신도 이번에는 장량과 뜻을 같이 하여 그런 한왕을 거들었다. 그러자 동쪽으로 쳐들어가자고 우기던 장수들도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불만스러운 대로 진채를 뽑아 관중으로 돌아갔다.

삼진을 차지한 뒤로 한왕은 도읍을 외진 남정(南鄭)에서 폐구나 함양으로 옮기려 했다. 특히 폐구는 옹왕(雍王) 장함이 도읍했던 곳이라 한왕은 내심 그곳을 새 도읍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함곡관을 들어서자 승상 소하(蕭何)가 보낸 이졸이 한왕을 기다리고 있다가 찾아와 말했다.

“승상께서 태자를 모시고 역양(轢陽)에서 기다리십니다. 대왕께서도 그리로 들라 하십니다.”

“파촉(巴蜀)에 있어야 할 승상이 어떻게 하여 역양에 있는가?”

한왕이 난데없어 하며 그 이졸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 이졸이 들은 대로 알려주었다.

“대왕께서 군사를 이끌고 함곡관을 나가셨다는 말을 듣자 승상께서는 파촉에 있는 승상부(丞相府)를 닫고 관중으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폐구와 함양을 두루 돌아보신 뒤에 마침내 역양에 자리 잡고 다시 승상부를 여셨습니다.”

역양은 새왕(塞王) 사마흔이 도읍했던 곳으로, 폐구나 함양에 비해 물이 멀고 외진 땅이었다. 한왕은 소하가 그곳을 도읍으로 고른 까닭이 궁금했지만 만나서 물어보기로 하고 역양으로 길을 잡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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