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조희제] 2009년 대중문화 코드 재해독 - ①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2월 31일 13시 57분


올 한해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인 걸그룹 소녀시대가 ‘2009 골든디스크 시상식’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스포츠동아 자료사진)
올 한해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인 걸그룹 소녀시대가 ‘2009 골든디스크 시상식’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스포츠동아 자료사진)


또 다시 한 해가 넘어가고 있습니다.

용산참사, 금융위기, 김수환 추기경과 전직 대통령 두 분의 서거, 4대강과 세종시를 둘러싼 끝날 것 같지 않은 갈등 등…. 2009년 한해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달아 터져 나왔습니다. 이렇게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도 꾸역꾸역 삶을 살아낸 우리 스스로에게 우선은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대중문화가 아무리 가볍고 말초적이며, 심지어 약물 같은 쓸모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대중문화 역시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고 반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2009년. 그러니까 민주화라는 시대적, 정치적 화두가 일단락되고(비극적이었든, 시대적 사명을 다한 것이든), 세계경제가 호황에서 불황으로 그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하고, 한국사회의 새로운 동력에 대한 갈등이 터져 나왔던 이 결정적 1년의 대중문화 역시 이 시대적 상황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1. 걸그룹의 소환, 삼촌세대의 귀환

2009년 대중문화를 복기하기 위해서는 뭐니뭐니해도 최고의 히트상품이었던 걸그룹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천진난만하게 방긋방긋 웃어주는 걸그룹이 어두웠던 2009년의 경제, 사회, 정치와 무슨 관련이 있냐구요?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그 점이 심히 유감스럽습니다.

걸그룹 인기의 이면에는 30대 삼촌부대의 막강한 힘이 존재합니다. 30대 삼촌부대. 우리는 이들의 과거를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9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70~80년대 학번들이 만들어 놓은 민주화 사회를 경험했고, 90년대 대중문화의 폭발의 수혜를 받았던 축복받은 세대이자 IMF를 맞이했던 비운의 세대이기도 합니다. 정치문화적 자유를 만끽했지만 경제적 어려움도 겪어야 했던 이 세대들이 이제 30대 중후반이 되어 소녀들의 삼촌으로 귀환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의 귀환이 시간이라는 불가역적 질서를 깨뜨리며 이루어졌고, 그로인해 꽤나 음울한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입니다. 삼촌세대들은 흔히 일어나는 복고 혹은 회고의 형태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몇 년 전 나타났던 7080 트랜드는 추억을 매개로 한 회고적 기운이었습니다. 이미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음을 전제로 한 복고. 그러므로 7080은 주변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9년의 삼촌세대들은 자신들의 추억을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소녀들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소비하면서 돌아왔습니다. 빛나던 젊은 시절을 뒤로하고 일상에 젖어들어 대중문화와는 거리를 두어야 마땅할 삼촌들이 소녀들의 소환에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귀환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소환시킨 것은 어쩌면 소녀들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10년의 세월을 없었던 것인 양 복귀시키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30대의 삼촌들을 20대의 청춘으로 회춘시킨 것일 수도 있습니다.

2. 88만원 세대 문화의 등장

88만원 세대은 스스로를 '잉여'로 표현하지만 가수 장기하는 88만원 세대도 감정을 갖고 일상을 살아가며 분노할 줄도 하는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선포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88만원 세대은 스스로를 '잉여'로 표현하지만 가수 장기하는 88만원 세대도 감정을 갖고 일상을 살아가며 분노할 줄도 하는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선포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9년 대중문화의 또 다른 한 축은 88만원 세대 문화일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20대들이 자신 스스로를 '잉여(剩餘)'로 칭하는 모습을 흔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단 싸워보기는 한 루저도 아니고, 직업은 없지만 그래도 인간적 존재이기는 한 백수도 아닙니다. 그들은 남아돌아 쓸모도 없고 눈에 띄지도 않는, 그래서 인간적 존재도 아니며 딱히 뭐라고 정체성을 부여할 수도 없는 '잉여'로 스스로를 표현합니다. 그래서 88만원 세대들은 현실에 억눌려 자기정체성마저 희미하다는 의심을 받아왔습니다.

장기하의 출현은 2009년 대중문화가 건진 최대의 수확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는 기념비적인 자신의 첫 앨범을 통해 희미한 정체성을 가진 88만원 세대도 감정을 갖고 일상을 살아가며 가끔씩은 분노할 줄도 하는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선포했습니다. 이러한 선언은 하반기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던 개그콘서트의 '워워워'를 통해 변주됩니다. 현실에 대한 분노가 어린 동생들에게 저주로 변형되긴 하지만 '워워워' 역시 88만원 세대의 감정에 기반하여 대중적 호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개콘의 또 다른 코너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에서 드디어 88만원 세대와 IMF를 경험했던 삼촌세대가 조우합니다. 10여년 만에 또다시 직면한 경제적 위기감에 삼촌세대들은 인사불성으로 술을 마십니다. 하지만 약간의 정치적 충돌 경험이 있었던 그들은 88세대와 달리 분노를 사회와 국가를 향해 표출합니다. "도대체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야?"

3. 정치 사극 혹은 사극의 정치

자, 드디어 국가가 대중문화 속에 등장했습니다. 사실 자본과 정치권력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대중문화에 국가에 대한 분노가 표출된다는 것은 꽤나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더 핵심적인 것은 대중들이 즐거워한다는 것이겠지요.

1000년도 훨씬 전의 이야기인 사극이 현대 정치극만큼이나 현실적이고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대중의 불만과 불안은 국가는 어떠해야 하고 왕은 어떠해야 하고 정치는 어떠해야 하는가로 발전했습니다. 덕만과 미실의 몇 차례 이어진 토론이 인구에 회자되었던 것은 1000년 전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곳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덕만과 미실의 대결에서 승자가 불분명하다는 것도 매우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가 아닐까합니다. 기존의 케케묵은 사극의 선악구도와 달리 '선덕여왕'의 선덕과 미실은 양자 모두 선과 악을 동시에 갖고 있었습니다. 대중들도 선한 정치 이면의 악, 악한 정치 이면의 선을 들여다보고 복합적으로 사고하고 있다는 것을 제작진이 인정한 것이겠지요. 아무튼 대중들이 2009년을 통해 정치를 생각하는 대중들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확인된 셈입니다.

MBC '선덕여왕'에서 덕만과 미실의 정치적 토론은 10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대중들에게 회자됐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MBC '선덕여왕'에서 덕만과 미실의 정치적 토론은 10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대중들에게 회자됐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4. 남자 VS 여자, 영원한 애증의 관계

경제, 정치, 역사라는 거대담론이 다시 되살아난 가운데, 또 늙어버린 삼촌세대들이 회춘하는 틈바구니에서 비교적 일상성에 기반한 문화적 코드가 있었다면 바로 남자 대 여자의 대결구도입니다. 물론 남자 여자의 대결구도는 매우 정치적 관계입니다만 워낙 다른 코드들이 거대한지라 다소 가볍게 즐길 수 있었던 2009년의 문화코드로 기억될 것입니다.

먼저 남녀 대결구도의 물꼬를 튼 것은 바로 개콘의 '남보원'입니다. 육체와 정신은 초식남이 되어 연약하기 그지없고, 경제적 현실은 88만원인 남성들은 머리띠 매고 주먹을 불끈 쥔 채 여성들에게 저항합니다. 원래 저항이란 약자가 강자에게 하는 것이지요. 남자가 약해지고 여자는 강해진 역전된 상황. 남보원의 개그는 이런 의미에서 웃음을 보장해 줍니다.

하지만 남보원은 남녀간의 대결과 갈등을 전제로 합니다. 군가산점을 둘러싼 역차별 논란, 해프닝이었지만 폭발성은 강했던 루저 발언 사태, '명품녀', '개똥녀', '김여사'로 상징되는 여성에 대한 잠재적 분노는 아직도 여전히 존재하는 남녀간의 갈등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대결구도에 약간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하반기 돌풍을 일으킨 '남녀탐구생활'입니다. 남자들이라면 다들 동감하고 웃을 수 있는 남자들의 지저분함. 여자들이라면 다들 동감하고 웃을 수 있는 여자들의 여우짓. 여자는 모르고 있었던 남자들의 세계, 남자들은 모르고 있었던 여자들의 세계를 번갈아 보여주었던 이 프로그램은 상대방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양자간의 화해를 시도하는 영악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5. 무미건조한 말투, 그 숨겨진 전략

남녀탐구생활에서 또 하나 주목해 볼 것은 바로 내레이션의 무미건조함입니다.

"남자여자몰라요. 여자남자몰라요"로 시작되는 이 내레이션은 속도는 빠르고, 발음은 정확하며, 억양이나 목소리 톤의 변화가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무미건조한 말투는 앞서 이야기했던 장기하의 노래에서도 중요한 전략으로 구사되었다는 점에서 2009년 문화적 코드의 하나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지극히 무미건조한 말투. 이 말투 속에 숨겨진 전략이 존재합니다.

"싸구려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로 시작하는 장기하의 노래들은 국어책을 읽듯이 덤덤하게 이어집니다. 심지어 "죽을둥 살둥 왔는데 아무것도 없잖어"라며 분노한 때도 목소리 톤의 변화는 없습니다.

무미건조하고 덤덤한 말투는 실로 격렬한 사회를 벗어나는 그만의 전략일 것입니다. 지리멸렬하고 가난한 88만원 세대의 현실이 격렬하게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덤덤하게 읊조림으로 인해 현실을 객관화시키고 듣는 이들에게는 브레히트식의 낯설게 하기를 시도합니다. 또 그렇게 덤덤하게 읊조림으로 인해 격렬한 현실을 벗어날 방법이 없음을 폭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목소리를 높이고 기를 쓰고 덤벼봐도 변화하지 않는 현실에 대응하는 전략으로 장기하가 제시하는 것이 바로 이 무미건조한 말투인 것입니다.

이러한 전략은 남녀탐구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녀 간의 문제는 잠재된 폭발성이 너무 커서 자칫 잘못하면 큰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남녀 간의 화해를 시도하는 남녀탐구생활의 건조한 말투는 이런 문제를 회피하기 위한 꽤나 영악한 방안입니다. 게다가 문제를 객관화시키는 효과까지 얻을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KBS2 '개그콘서트'의 코너 남성인권보장위원회는 남자가 약해지고 여자는 강해진 역전된 상황을 보여준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KBS2 '개그콘서트'의 코너 남성인권보장위원회는 남자가 약해지고 여자는 강해진 역전된 상황을 보여준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6. 올레! 올레길 열풍

대중매체를 통해 실현된 대중문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중들이 만들었던 문화를 마지막으로 2009년을 갈음해보고자 합니다.

길을 걷는 것이 문화현상으로 떠오른 이상한 한 해로 2009년은 기억될 만합니다.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바다건너 제주도의 길을 짧게는 1박 2일 길게는 1주일씩 걷고 또 걸었습니다. 올레길 코스도 벌써 15개로 늘어났죠. 제주도나 관광업계는 지역산업발전이나 관광산업의 히트상품 발굴이라고 흥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이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걸었을까요?

제주 올레길의 원조는 스페인의 카미노 데 산티아고입니다. 성자 야곱의 묘를 찾아가는 성지 순례길입니다. 제주도에 성지는 없습니다. 하지만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성지순례라도 하는 듯합니다. 자기 자신을 찾아가든, 세상사의 복잡함을 잠시 달래러 가든 올레꾼들은 마치 무슨 사명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 길을 걷습니다.

이 지점에서 명동성당과 봉하마을로 이어졌던 끝없는 추도행렬이 겹쳐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현실에서의 거대한 상실감은 때로는 종교적인 것으로의 회귀로 이어집니다. 성지도 찾아볼 수 없고, 제각각 다른 생각과 다른 현실로 길을 걷겠지만 그들의 모습이 순례자처럼 보이는 것또한 2009년 우리가 살아온 사회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코드일 것입니다.

조희제/ 문화평론가 sirag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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