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5세대 지도부 인물-리더십 집중탐구]<5> 위정성 서열 4위 태자당 맏형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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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세도家 출신… “당이 정하면 재산공개”

《 “최근 중국 100년의 역사에서 위정성 집안이 최고의 세도가다. 정·군·학 경제계에 없는 사람이 없다.” 위정성(兪正聲·67·사진) 신임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상하이(上海) 시 당 서기는 올해 홍콩에서 출간된 중국 지도부를 설명하는 책에서 이렇게 묘사됐다. 》
위정성은 15일 제18기 공산당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1중 전회)에서 권력서열 4위의 상무위원이 됐다. 내년 3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정협) 주석’을 맡을 가능성이 크다.

위 상무위원의 가문은 청 말 유력가문에서 격동의 중국 혁명기를 거쳐 혁명원로 집안으로 탈바꿈한다. 문화혁명 때는 많은 가족이 숨지는 참담한 고통도 겪었다. 그런 탓인지 그는 매사에 조심스럽다.

○ 현란하고 복잡한 가족사

위정성의 가족사에는 역사적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150여년 전 저장(浙江) 성 사오싱(紹興)에서 태어난 증조부 위밍전(兪明震·1860∼1918)은 청나라 말기 교육계 인사로 난징(南京) 장난수이스(江南水師)학당의 교장을 지냈다. 이 학교에는 훗날 중국의 대문호가 되는 루쉰(魯迅·1881∼1936)이 다녔다. 루쉰의 은사인 것이다.

증조부로부터 내려오는 방계 가족에 전 대만국방부장, 장제스(蔣介石)의 아들이자 대만 총통을 지낸 장징궈(蔣經國)의 사위, 베이징(北京)대 전 총장의 부인, 국학대사 등이 있다.

직계는 공산당 혁명의 길에 나섰다. 부친 위치웨이(兪啓威·1912∼1958)는 황징(黃敬)이란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그는 대학생 때 공산당에 참가한 혁명원로로 신중국이 세워진 뒤 초대 톈진(天津) 시장과 국가기술위원회 주임 겸 제1기계공업부 부장까지 지내다 1958년 46세로 병사했다.

황징은 20세에 산둥(山東)대를 다닐 때 도서관에서 일하던 18세의 여성 리윈허(李雲鶴·1914∼1991)와 동거했다. 리윈허는 나중에 이름을 장칭(江靑)으로 바꾼 뒤 마오쩌둥(毛澤東)과 결혼했다. 바로 마오의 네 번째 부인이자 문화대혁명의 4인방 중 한 명이다.

모친 판진(范瑾·1919∼2009)은 역시 혁명원로로 베이징(北京) 부시장을 지냈다.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판원란(范文瀾·1893∼1969)의 여동생이다.

위정성에게는 형 2명과 여동생 1명이 있다. 큰형 창성(强聲)은 중국의 국가정보원인 국가안전부에서 국장까지 지냈다. 그는 1985년 미국으로 망명해 큰 파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미국에서 40여 년을 암약하던 중국 간첩 진우다이(金無怠)가 체포돼 자살했다. 큰형 탓에 위정성은 벼슬길이 막힐 뻔했다. 작은형 민성(敏聲)은 정치개혁을 줄곧 주장해온 중국의 유명한 정치사회학자다. 여동생 츠성(慈聲)은 2009년부터 베이징 시 정보화업무 판공실 부주임으로 일하고 있다.

원래 여동생이 한 명 더 있었다. 문화대혁명 당시 고등학생이던 바로 밑 여동생 후이성(惠聲)은 박해에 시달리다 정신병을 얻어 자살했다. 모친 역시 반당분자로 몰려 박해를 받고 감옥살이를 했다. 외할머니는 공사판에서 굶어죽었다고 한다. 위정성은 지난해 6월 상하이 자오퉁(交通)대에서 강연을 하다가 “친척 친지 중 문혁 때 죽은 사람이 예닐곱이다”라고 말했다고 홍콩 언론은 전한다.

○ 부친의 음덕

위정성은 베이징의 고급 간부 자녀들이 다니던 ‘81학교’와 ‘4중(中·한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졸업하고 1963년 명문 하얼빈군사공정학원에 진학한다. 1968년 23세에 졸업하지만 문혁의 광풍으로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그는 허베이(河北) 성 장자커우(張家口)에 있던 한 공장의 기술요원으로 하방돼 7년을 머문다. 1975년 베이징에 돌아와 전자공업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해 1984년에는 부사장(부국장)까지 승진한다.

당시 전자공업부 부장이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다. 장 전 주석은 위정성의 부친이 1950년대 제1기계공업부 부장으로 있을 때 부하였다. 장 전 주석과는 부자간에 모두 인연이 깊은 것이다. 장 전 주석은 그를 적극 후원했다.

위정성은 한 살 많은 덩샤오핑(鄧小平)의 아들 덩푸팡(鄧朴方·68) 중국장애인연합회 명예주석과는 오랜 친분이 있다. 1984년 덩 명예주석과 함께 중국장애인복지기금회에서 일하기도 했다. 덩푸팡은 아버지 덩샤오핑에게 “위정성은 총리감이다”라고 적극 추천했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는다.

○ ‘시진핑을 따라 배우자’

1992년 위정성 당시 산둥 성 칭다오 시장(왼쪽)이 칭다오 경제개발구의 외국 합자기업을 시찰하고 있다. 사진 출처 신화통신
1992년 위정성 당시 산둥 성 칭다오 시장(왼쪽)이 칭다오 경제개발구의 외국 합자기업을 시찰하고 있다. 사진 출처 신화통신
위정성은 1985년 산둥 성 옌타이(煙臺) 시 부서기로 지방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가 주도한 주택제도 개혁은 큰 성공을 거둬 향후 성공의 발판이 됐다. 이후 칭다오(靑島) 시 서기와 건설부장, 후베이(湖北) 성 서기를 거쳐 2002년 가을 제16차 당대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에 올랐다. 시진핑(習近平) 신임 총서기는 당시 한 단계 아래인 중앙위원이었다.

위정성은 시진핑 당시 상하이 시 서기가 2007년 황태자로 발탁되자 후임으로 서기를 맡는다. 장 전 주석의 배려가 있었다고 한다. 위정성은 당시 “시진핑 동지에게 배워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나이도 여덟 살 많고 경력 집안 배경 등 어느 면에서나 앞섰던 위정성이 머리를 숙인 것이다.

최근 18차 당대회에서 그는 공직자 재산 공개를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재산이 별로 없다”며 “당 중앙이 결정하면 재산을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또 위정성은 “내 아내는 이미 퇴직해 아무런 직책이 없으며 아들은 자신의 밥벌이를 위해 매일 힘들게 살고 있다”고도 했다. 또 “아들에게 상하이에서 일하지 말고, 나와 관계되는 상하이의 단위(單位·기관 또는 회사)나 공직자와 접촉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재산 축적과 부패, 특권 등의 말을 듣지 않으려 노력해 왔다. 2010년 양회(兩會) 때도 비슷하게 발언했다. 홍콩 언론에 따르면 그는 “내 월급은 1만1000위안(약 193만 원)이고 담배는 내 돈으로 사 피우며 옷도 시장에서 산다”고 말했다고 한다. 위정성은 한국을 잘 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전부터 한국인이 진출하기 시작한 산둥 성 칭다오 시에서 10년간 시장과 서기 등으로 재직했다.

베이징=이헌진 특파원 mungchii@donga.com
#중국#시진핑#위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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