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칼럼]이왕 적진에 들었으니 두려움 심고 와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5일 18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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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北核(북핵) 解決(해결)은 우리의 召命(소명)입니다.”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김정은을 만나는 특사로 평양행 비행기를 탔다는 뉴스 특보를 듣자마자 6년 전 직접 얻은 그의 저서를 다시 펼쳐봤다. 동국대 북한학 박사 출신인 그가 2012년 2월 24일 이화여대 교수실을 찾은 기자에게 건네며 속표지에 적어준 글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1993년과 2003년 시작된 북핵 1, 2차 위기를 소재로 ‘북한의 선군외교 연구: 약소국의 대미 강압외교 관점에서’라는 학위 논문을 쓴 그는 자신이 국정원 3차장으로 재직했던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 맺어진 2·13합의와 10·3합의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무력화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북한을 끌어안고 미국과 대화시켜 둘의 구원(舊怨)을 풀어주면 ‘북핵 해결’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2012년 12월 대선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지원하며 정치의 길에 들어섰다. 주군이 선거에 져 다시 4년 가까운 인고의 시간을 거친 그는 최순실 국정농단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라는 순풍을 만나 지금의 자리까지 날아올랐다. 급기야 김정은에 대한 첫 남한 특사단의 핵심 인사가 된 그는 ‘북핵 해결은 소명’이라는 초심을 잃지 않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국정원을 떠나며 북한학 박사가 된 뒤 9년여 동안 상황이 악화된 나머지 자신의 특기인 대화와 협상만으로 문제를 풀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정보 수장이 된 뒤에도 남북 대화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한동안 “쉽지 않다. 전망이 밝지는 않다”고 입에 달고 다녔다.

현직 시절 평생을 외교 현장에서 보낸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역시 지금 상황을 외교로만 풀 수 있다는 기대에 의심을 가진 지 오래됐을 법하다. 평양 방문이 처음인 그 역시 취임 이후 핵개발과 저지를 둘러싼 북-미 간의 치열한 물밑 외교전과 군사분계선을 가운데 두고 벌어지는 군사적 긴장 상황을 청와대 지하 벙커에서 몸소 체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이들은 둘을 ‘대북 협상 전문가’와 ‘허버트 맥매스터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연결되는 대미 외교라인’이라고 치켜세우고 있지만 그건 절반뿐이다.

분단국인 대한민국의 국정원장은 대화와 협상뿐만 아니라 치열하고 교묘한 대북 공작을 통해 북한 3대 세습체제를 이완시키고 개혁개방과 통일의 길에 들어서도록 할 의무도 갖는다. 국가안보실장 역시 북-미의 외교적 중매자 역할과 동시에 북한이 레드라인을 넘어 미국의 군사적 공격을 자초하는 절명의 상황에 동맹국을 도와 작전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하는 안보 수장 역할도 맡고 있다.

물론 겹겹의 제재에 달러가 마르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핵·미사일 기지 폭격과 참수 위협에 시달리는 평양의 초대자들은 ‘약자 코스프레’ 작전으로 나올 것이다. ‘공화국의 핵무력은 미제의 침략 전쟁을 막기 위한 자위용’이라고 강변할 것이다. 그러곤 특사단의 1박 2일을 김 씨 3대 세습체제의 유지를 위한 선전에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두 사람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상황을 마음으로 반대했다. 하지만 이미 군사분계선을 넘은 그들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싶다.

“대통령의 특사단으로 예의는 갖춰야 하겠지만, 부디 대한민국의 안보와 정보 수장이라는 본분과 존엄을 잊지 마시오.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권한과 책임으로 그들이 두려움을 가질 수 있도록 하세요. 세계가 지켜보고 있고, 역사가 후대에 남길 것입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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