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 일으킬 수 있는 자료 삭제” 국정원 직원 유서 공개에도…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19일 17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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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해킹 프로그램 구입의 총괄 책임자로 알려진 국정원 과장 임모 씨는 불법 도청 및 해킹 의혹이 일자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유서에서 “내국인 또는 선거 관련 사찰은 없었다”며 의혹을 일축했다. 하지만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자료를 삭제했다”고 밝혀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 유서 공개 뒤에도 가라않지 않는 논란

동아일보 취재 결과 임 씨는 국정원의 사이버보안기술 지원파트에서 일하는 내근직 요원이다. 대테러, 방첩 파트에서 요주의 인물(타깃)을 찍어주면 이들에게 RCS와 같은 스파이웨어를 보낸 뒤 정보 및 첩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 씨는 이 때 사용할 해킹 프로그램을 골라 구매하는 실무 책임자였다.

임 씨는 유서에서 “지나친 욕심이 오늘의 사태 일으켰다”고 남겼다. 이탈리아 해킹팀을 동원하면서까지 정보수집에 나선 것이 결과적으로 국정원 불법사찰 의혹을 일으킨 점을 곤혹스러워한 듯한 대목이다. 그는 또 “정말 내국인에 대한, 선거에 대한 사찰은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조직의 위상을 위해’ 해킹 자료를 스스로 삭제함으로써 오히려 그의 주장은 진위를 의심받을 상황에 놓였다.

일각에서는 임 씨가 독자적인 판단으로 일부 자료를 삭제한 것이 오히려 국정원을 난처하게 만들었다는 자괴감이 더 컸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국정원이 해킹 대상과 관련한 정보를 공개하기로 한 마당에 관련 자료를 독단적으로 삭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정원이 ‘불법 사찰’ 의혹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유서공개를 반대하던 유족들은 국정원과 경찰, 다른 가족들의 설득 끝에 이날 오전 유서를 공개했다. 경찰은 현장에서 유서를 쓴 필기구가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미뤄 임씨가 집에서 미리 유서를 작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 집 나온 뒤 바로 극단적 선택한 듯

임 씨가 용인 자택을 나선 것은 18일 오전 5시 경. 부인에게는 “직장에 일찍 나가봐야 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정원 해킹 사태가 정치적 쟁점이 된 이후 임 씨는 가족들에게 “요즘에 직장 업무 때문에 힘들다”는 얘기를 자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인은 남편이 나간 뒤 의심스러워 계속 휴대전화로 연락했지만 연결에 실패했다. 신호가 갈 뿐 남편은 받지 않았다. 10차례 통화 시도가 무산되자 불안감을 느낀 부인은 이날 오전 10시 4분 119에 “남편을 찾아달라”며 신고를 했다. 소방관에게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위해 번호를 알려줬고, 소방관들은 임씨의 휴대전화 위치추적에 나섰다.

최종 GPS 위치가 용인시 이동면으로 나오자 용인소방서 이동 119안전센터는 3명의 요원과 2명의 구급대원 등 5명이 현장으로 출동했다. GPS 위치값은 기지국과 달리 반경 30~50m까지 정확히 나오기 때문에 산속이라도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임 씨가 발견된 곳은 이동면 화산리 화산CC 인근 화산1리 마을회관에서 500여 m를 산길로 들어간 고라지골이라는 곳이었다. 임 씨는 마티즈 차량 운전석에 앉은 채 숨져있었고 조수석과 뒷좌석 위에 다 탄 번개탄이 발견됐다. 유서는 조수석 번개탄 옆에 포개어져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19일 오후 강원 원주시 문막읍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동부분원에서 진행된 임 씨의 부검은 30여 분 만에 끝났다. 통상 부검이 2~3시간 가량 걸리는 것에 비해 신속하게 마무리됐다. 정낙은 국과수 중앙법의학센터장은 “외상 등 타살 혐의점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부검 결과 및 현장에서 발견된 가검물 등에 대한 검사 결과를 종합해 조속한 시일 내에 수사기관에 통보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도 “타살 혐의점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기도에서 일산화탄소 농도가 75%로 높게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임 씨의 시신이 임시로 안치됐던 경기 용인시 처인구 용인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모인 유가족들은 고인의 죽음에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한 유가족은 “평소 책임감이 강했던 임 씨가 두 딸을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며 “일개 과장이 무슨 권한이 있었겠느냐. 아이 아빠를 개죽음으로 몰아넣은 경위가 분명하게 밝혀져야 한다”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유가족들은 부검을 마친 임 씨의 시신이 도착하는 대로 인근 장례식장에 빈소를 마련할 예정이다.

남경현 기자 bibul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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