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의회엔 아직 ‘세습 귀족’이 있다 [시차적응]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4월 4일 09시 06분


영국 상원이 전체 842석 중 92석인 세습 귀족 의석의 의결권을 완전히 폐지하는 법안을 10일 통과시켰다. 군주제와 신분제 전통이 강한 영국에서 선출되지 않은 채 입법권을 행사하던 권력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동아일보 2026년 3월 13일, A25면 ‘英 상원 ‘세습 귀족 의석’ 완전히 없앴다’)

영국 상원에서 지난달 10일(현지 시간) 세습 귀족 92명의 의결권을 완전히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가문 혈통에 따라 의원직을 상속해 온 제도가 수백 년 만에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영국 일간 가디언 등은 5월로 예상되는 현 의회 회기 종료 이전에 공식적으로 제도가 사라질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영국의 의회 제도는 근대 의회 민주주의 제도의 시초로 불립니다. 귀족제 전통이 강한 영국이긴 하지만, 아직도 선출직이 아닌 ‘세습’ 귀족이 ‘입법 기관’에서 일한다는 사실에 놀란 분들도 계실 겁니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의회에서 손에 꼽히는 독특한 기관, 영국 상원을 살펴보겠습니다.

‘저 나라 사람들은 왜 그렇지?’ ‘우리와는 어떻게 다르지’ 국내외 뉴스 속 궁금증을 콕 짚어 새로운 시각에 적응시켜 드립니다.
영국 상원은 그 규모부터 특이합니다. 이번 법안 통과 이전 기준으로 총 842명의 상원 의원이 임기 없이 종신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의석 수 제한도 없어,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입법 기관으로 알려져 있죠.

상원과 하원의 차이는 각 의회의 회의실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3월 16일 영국 런던의 의사당의 하원 회의실에서 총리 질의응답(PMQ)이 진행 중인 모습. 영국 하원 유튜브 캡처
3월 16일 영국 런던의 의사당의 하원 회의실에서 총리 질의응답(PMQ)이 진행 중인 모습. 영국 하원 유튜브 캡처
2024년 7월 14일 영국 런던 의사당의 상원 회의실에서 찰스 3세 국왕이 의회 개원 연설(일명 ‘킹스 스피치’)을 진행하는 모습. 런던=AP 뉴시스
2024년 7월 14일 영국 런던 의사당의 상원 회의실에서 찰스 3세 국왕이 의회 개원 연설(일명 ‘킹스 스피치’)을 진행하는 모습. 런던=AP 뉴시스
하원 회의실은 상징색부터 초록색으로 상원의 붉은색과 구분됩니다. 사진상 구도가 조금 다르지만 한눈에 봐도 분위기가 다르죠. 의원들로 빽빽하게 들어찬 모습이 눈에 띌 뿐 건축에 시선이 가지는 않습니다. 영국 의회는 하원 회의실이 1852년 첫 개관 때부터 상원 회의실보다 작고 덜 화려하게 설계됐고, 1940년대 재건된 지금의 회의실도 단순한 건축 양식을 취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창문도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없는 일반 유리입니다.

반면 영국 의회는 황동색의 문과 황금빛의 왕좌, 붉은색 가구, 스테인드글라스 등으로 꾸며진 상원 회의실을 “(런던의 정치 중심지) 웨스트민스터에서 가장 화려하게 장식된 공간”이라고 표현합니다. 군주와 의회가 한 자리에 모이는 유일한 공간이라는 의미가 있어, 군주가 직접 발표하는 의회 개원 연설 ‘킹스 스피치’가 이곳에서 진행됩니다. 이 행사 때 상원의원들은 과거의 전통을 살려 흰 담비털로 장식된 붉은색 천옷을 입고 참여합니다. 하원의원들은 일반 정장을 입고 참석합니다.

실질적인 권력은 사라졌지만 상원은 여전히 고풍스러운 전통과 외양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상원 의원들은 런던 상원 의사당의 붉은색 벨벳 의자에 앉아 서로를 “고귀한 경(卿)(lord)”이라 부르며 회의를 진행합니다. 상원 의장은 ‘울색(woolsack)’이라 불리는 양털 의자 위에서 회의를 주재하는 전통을 수백 년간 이어오고 있죠. 현 상원 의장의 본명은 마이클 포사이스지만 공식적으로 불리는 명칭은 ‘드럼린의 포사이스 경’입니다.

영국 상원의장은 왕좌 앞에 놓인 붉은 의자 ‘울색’에 앉아 회의를 주재합니다. 사진은 2024년 2월 현 상원의장 마이클 포사이스가 첫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입니다. 그의 뒤에 군주의 권위를 상징하는 황금색 곤봉 ‘메이스’도 보입니다. 사진 출처 영국 상원 공식 홈페이지(촬영: 로저 해리스)
영국 상원의장은 왕좌 앞에 놓인 붉은 의자 ‘울색’에 앉아 회의를 주재합니다. 사진은 2024년 2월 현 상원의장 마이클 포사이스가 첫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입니다. 그의 뒤에 군주의 권위를 상징하는 황금색 곤봉 ‘메이스’도 보입니다. 사진 출처 영국 상원 공식 홈페이지(촬영: 로저 해리스)

●14세기부터 이어진 ‘귀족원’ 전통

상원의 역사는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영국에선 14세기 에드워드 3세 이후 의회를 상원인 ‘귀족원(House of Lords)’과 하원 ‘평민원(House of Commons)’으로 구분한 양원제를 운영해 왔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상원은 귀족과 성직자, 법률가 등으로 구성됐습니다. 하원은 지역을 대표하는 평민 의원들로 구성돼 귀족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17세기 청교도 혁명으로 공화정이 수립된 시기를 제외한 수백 년간 상원은 예산 결정과 법률 제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1911년과 1949년 의회법 개정으로 실질적 권한 대부분을 하원에 넘겨줬습니다. 현재는 하원에서 통과된 법안을 심층적으로 검토하고 수정안을 제출하는 역할이 핵심입니다. 최종 입법권은 선출직인 하원에 있어 상원에서 법안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현재 하원 의원이 전국 650개 선거구에서 1명씩 선출되는 것과 달리, 임명직인 상원 의원이 되는 방식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됩니다. 총리의 추천으로 국왕이 임명하는 ‘생애 귀족(life peer)’과 부모로부터 작위를 물려받은 ‘세습 귀족(hereditary peer)’이 있고, 나머지는 성공회 주교 20여 명으로 구성된 성직자 의원입니다.

2024년 7월 14일 영국 런던 의사당의 상원 회의실에서 국왕의 개원 연설이 진행 중인 모습. 영국 귀족원의 역사를 담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와 웅장한 건축 양식이 눈에 띕니다. 붉은 천 옷을 차려입은 상원 의원들도 보이고요. 런던=AP 뉴시스
2024년 7월 14일 영국 런던 의사당의 상원 회의실에서 국왕의 개원 연설이 진행 중인 모습. 영국 귀족원의 역사를 담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와 웅장한 건축 양식이 눈에 띕니다. 붉은 천 옷을 차려입은 상원 의원들도 보이고요. 런던=AP 뉴시스
영국 상원은 영국 의회 제도의 전통과 역사를 보존하는 기관으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또 하원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은 법안을 심도 있게 검토하고 토의하는 장으로 기능합니다.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을 상원으로 영입하며 전문가 심의를 통해 입법의 질을 높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이 선출하지 않은 기관이 지나친 권력을 행사한다는 비판, ‘세습’ 전통이 여론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은 계속 존재했습니다. 녹색당 소속 상원의원 제니 존스는 “우리는 명목상 현대 민주주의 국가이면서 실제로는 반봉건적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고 꼬집기도 했습니다.

결국 1999년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 당시 상원 개혁안으로 세습 제도가 폐지되면서 당시 759명이던 세습 의원은 92명만 남기고 모두 퇴출됐습니다. 이달 통과된 법안은 마지막 숙제를 마무리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만 이번 법안 통과가 세습 귀족의 완전한 퇴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은 짚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상원 보수당 원내대표는 세습 귀족 퇴출을 강행하면 노동당의 나머지 입법 전체를 막겠다고 공개 위협했고, 결국 보수당 세습 귀족 15명이 ‘생애 귀족’으로 전환돼 상원에 잔류하는 절충안을 받아냈습니다.

상원에서 영국 국왕 관련 국가 행사를 주관하는 직위 ‘얼 마셜(Earl Marshal)’과 ‘그레이트 체임벌린 경(Lord Great Chamberlain)’을 세습으로 보유한 두 귀족도 의결권은 잃었지만, 여전히 의회 출입이 허용되고 국가 행사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거듭된 ‘낙하산 인사’… 왕실보다 까다로운 귀족 작위 박탈

세습 귀족 폐지 이후에도 개혁 과제는 산적해 있습니다. 사실 1999년 개혁 이후 세습 귀족은 90명 이하로 줄고, 700명이 넘는 생애 귀족이 상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죠. 상원 개혁을 요구하는 이들은 입법부의 직책이 가문에 상속되는 것만큼이나,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 지명되는 생애 귀족 선정 절차에도 문제가 크다고 지적합니다.

왜 이렇게 생애 귀족의 숫자가 많아졌을까요? 세습 귀족을 제외하면 상원의원이 되는 방법은 사실상 한 가지로 좁혀집니다. 총리의 추천입니다. 2000년에 독립된 ‘상원 임명 위원회’가 설립됐지만 최종 추천권은 총리에게 있고, 후보자 검증에 요구되는 기준도 없습니다.

이렇다 보니 총리가 전직 보좌관이나 장관 등에게 보상처럼 공직을 안겨주는 수단으로 상원의원 임명이 남용됐다는 비판이 오랫동안 제기됐습니다. 거칠게 말해서, 일의 책임은 크지 않은데 내세우기는 좋은 명예로운 직함이다 보니 매 정권에서 ‘은혜 갚기’ 수단으로 활용해왔단 겁니다. 상원 의원은 하원 의원과 달리 봉급을 받지 않는 명예직이어서, 회의 출석 수당은 있지만 본업과도 병행이 가능합니다.

특히 제대로 임명·검증 절차를 거치지 않은 상원의원들이 범죄나 스캔들에 연루되면서 이들을 징계할 수단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1992년 상원의원에 임명된 소설가 출신 정치인 제프리 아처는 2001년 위증죄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지만, 당시엔 수감된 의원을 제명할 법적 근거 자체가 없었습니다.

이후 1년 이상 실형 시 의원직 자동 박탈 규정은 2014년, 품위 위반으로 제명할 수 있는 근거는 2015년에야 만들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징계로 퇴출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성폭행을 저지른 의원과 코카인 흡입 장면이 촬영된 의원이 각각 자진 사퇴로 사태를 마무리한 것이 전부입니다.
2015년 영국 타블로이드지 더선은 세습되지 않은 종신 귀족인 존 스웰 남작(baron)이 성매매 여성들과 함께 코카인을 흡입하며 파티를 벌였다고 폭로해 정계를 뒤흔들었습니다. 당시 상원 부의장이었던 그는 논란 끝에 의원직을 사임했습니다. 사진 출처 소셜미디어 X
2015년 영국 타블로이드지 더선은 세습되지 않은 종신 귀족인 존 스웰 남작(baron)이 성매매 여성들과 함께 코카인을 흡입하며 파티를 벌였다고 폭로해 정계를 뒤흔들었습니다. 당시 상원 부의장이었던 그는 논란 끝에 의원직을 사임했습니다. 사진 출처 소셜미디어 X
가장 최근에는 주미 영국대사 등을 지낸 영국 노동당의 거물 정치인 피터 맨델슨이 ‘제프리 엡스타인’ 스캔들에 휘말려 올 2월 자발적으로 자리를 내려놨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맨델슨 경(Lord Mandelson)’입니다. 작위 박탈에는 의회 입법이 필요한데, 이 절차가 마지막으로 쓰인 건 1917년 독일 편을 든 귀족들을 처벌했을 때입니다.

반면 같은 엡스타인 스캔들에 연루된 앤드루 왕자는 지난해 10월 ‘왕자(Prince)’ 칭호와 모든 훈작이 박탈됐습니다. 왕실의 칭호는 왕실 명령으로 즉각 박탈할 수 있지만, 상원의원의 귀족 작위는 입법 절차 없이는 손댈 수 없는 것입니다. 블룸버그통신은 이 대조적인 장면이 상원 제도의 구조적 맹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국 주재 대사를 지낸 영국 노동당의 중진 정치인 피터 맨덜슨(73).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신노동당’ 정책 핵심 설계자이자 막후 실세로 활약하며 “어둠의 왕자”라는 별명이 붙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미성년자 성착취범 제프리 엡스타인 관련 문건에서 그가 엡스타인과 가까운 사이였음이 드러났고, 장관 시절 기밀 정보까지 유출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상원의원직을 내려놨습니다. 뉴시스
미국 주재 대사를 지낸 영국 노동당의 중진 정치인 피터 맨덜슨(73).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신노동당’ 정책 핵심 설계자이자 막후 실세로 활약하며 “어둠의 왕자”라는 별명이 붙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미성년자 성착취범 제프리 엡스타인 관련 문건에서 그가 엡스타인과 가까운 사이였음이 드러났고, 장관 시절 기밀 정보까지 유출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상원의원직을 내려놨습니다. 뉴시스

수십 년째 공전하는 개혁 논의

상원 제도의 순기능을 인정하는 측에서도 현행 구조의 지속은 어렵다고 봅니다. 이에 단기적인 운영 개선안도 논의 중입니다. 노동당은 의원이 80세가 되면 의무적으로 은퇴하는 정년제를 당 매니페스토에 포함시켰으며, 현재 위원회에서 세부 사항을 다듬고 있습니다. 회의에 거의 참석하지 않으면서 직위만 유지하는 의원들을 걸러내기 위한 최소 출석·활동 기준 도입도 함께 검토되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상원 자체를 선출제 기관으로 전환하자는 구상도 있습니다. 노동당은 임명제 상원을 폐지하고 비례대표제 등을 통해 지역을 대표하는 ‘국가 및 지역 협의회’로 교체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귀족원(House of Lords)’이라는 계급 중심의 명칭 대신 ‘원로원(Senate)’ 같은 현대적 이름으로 바꾸자는 제안도 함께 거론됩니다. 임명 검증 단계의 개혁 사례로는 캐나다가 있습니다. 캐나다는 2016년 상원의원 후보 추천 과정을 초당파 독립자문위원회에 맡기는 방식으로 제도를 바꿔 높은 국민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다만 이런 개혁 논의가 수십 년째 공전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런던대학교 메그 러셀 정치학 교수는 AP통신에 “상원 개혁은 빙하(glacial) 속도로 진행된다. 수십 년간 논의해도 실현되지 않는다”고 꼬집었습니다. 이번 법안 통과가 진짜 상원 변화의 불씨가 될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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