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왔어요 [뉴욕의 순간]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2월 7일 09시 00분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사진과 함께 뉴욕 속 이야기로 떠나는 짧은 여행.
기사에 담지 못한 뉴욕의 순간을 전해드립니다.
이 순간의 음악: Silver White - Slowfly (feat. Revel Day)

뉴욕의 불빛에 더해진 크리스마스 트리의 모습.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뉴욕의 불빛에 더해진 크리스마스 트리의 모습.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요즘 뉴욕은 나무 천국입니다. 작게는 무릎 정도 높이 나무부터, 크게는 아파트 7~8층 높이 나무에 이르기까지, 도시 여기저기에 없던 나무들이 생겨났어요. 바로 크리스마스 트리 이야기입니다.

뉴욕시의 아파트 건물 앞에 생긴 크리스마스 나무 판매소의 모습.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뉴욕시의 아파트 건물 앞에 생긴 크리스마스 나무 판매소의 모습.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보통 크리스마스 때 플라스틱으로 만든 트리를 쓰는 한국과 달리, 숲 부자, 나무 부자인 미국은 크리스마스 장식용으로 직접 숲이나 농장에서 잘라 온 ‘생나무’를 많이 씁니다. 그래서 주변에 숲이 많지 않은 뉴욕시에는 11월이 되면 동네 여기저기, 블록 사이사이에 나무(판매)꾼들이 나타납니다. 이 간이 나무판매소가 보이기 시작하면 ‘아, 이제 정말 크리스마스가 오는구나’하는 게 실감 나는거죠. 그러니까 말하자면 뉴욕의 크리스마스는 가장 먼저 나무와 함께 오는 겁니다.

작년과 다른 위치로 옮긴 브루클린의 나무 판매소가 주민들이 당황하지 않게 이동한 곳을 공지해 놨다.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작년과 다른 위치로 옮긴 브루클린의 나무 판매소가 주민들이 당황하지 않게 이동한 곳을 공지해 놨다.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생나무의 가격은 그 크기와 모양에 따라 결정된다.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생나무의 가격은 그 크기와 모양에 따라 결정된다.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뉴욕의 크리스마스 정취에서 빠질 수 없는 나무 판매소의 모습.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뉴욕의 크리스마스 정취에서 빠질 수 없는 나무 판매소의 모습.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나무는 가지가 손상되지 않게 접힌 채로 끈으로 잘 동여매져서 도시로 들어오는데, 캐나다나 버몬트 주처럼 숲이 많은 지역에서 가져온다고 하더라고요. 구매를 하려는 사람에게는 판매자가 끈을 풀어 나무의 펼쳐진 상태를 보여줍니다. 뉴요커들은 나름 심각하게 가지 양쪽 균형이 잘 맞는지, 키는 적당한지 등을 따져 나무를 고릅니다. 작은 나무는 직접 가져가기도 하지만 큰 나무는 몇십 불 정도 내고 배달을 받기도 하고요.

이런 뉴욕의 크리스마스 나무 중에서도 왕중왕은 바로 맨해튼 록펠러 센터 앞에 세워지는 트리입니다. 1931년 록펠러 센터를 짓던 건설 노동자들이 세웠던 크리스마스 트리에 유래해 거의 100년간 이어져 왔다는데, 처음엔 6m 정도 크기였던 것이 이제는 매년 높이 약 23m, 무게 11t에 달하는 나무로 세워지고 있습니다. 사실 트리 모양이나 디자인은 매년 거의 같아서 딱히 새로울 게 없는데, 그 크기 자체가 워낙 압도적이다보니 세워질 때마다 항상 도시 전체가 들썩입니다.

올해 나무는 어디서 오냐, 기부자는 어떤 사연을 담고 있냐, 과연 며칠간 몇 키로미터를 이동해서 맨해튼에 들어오냐까지…. 록펠러 트리는 세워지기도, 아니 잘라지기도 전부터 이미 뉴욕을 들썩이게 하는 크리스마스의 인싸입니다.

뉴욕의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인 록펠러 센터 크리스마스 트리의 점등 모습. 출처: 록펠러 센터
뉴욕의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인 록펠러 센터 크리스마스 트리의 점등 모습. 출처: 록펠러 센터

20m가 넘는 거대한 나무가 실려 와야 하는 만큼, 록펠러 센터 나무는 대체로 뉴욕주나 코네티컷이나 메사추세츠 같은 뉴욕시 근처 주에서 선정되는 것 같습니다. 재밌는 건 록펠러 센터에 일년 내내 이 나무만 찾으러 다니는 전문 직원이 있다는 점이에요. 록펠러 센터 수석정원사로 ‘크리스마스 트리계의 산타클로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에릭 파우즈란 분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 분은 40년 넘게 크리스마스에 록펠러 센터 앞에 세울 나무를 찾아다니는 업무를 맡고 있다고 하는데, 뉴욕주 반경 6개 주 이내 지역들을 돌며 내년, 내후년, 혹은 내후후년에 쓸 아름답고 잘생긴 나무들을 찾아다닌다고 합니다. ‘이 녀석이다!’ 싶은 나무를 찾으면 소유주에게 록펠러 센터 크리스마스 트리로 기증할 의사가 있는지 묻고, 동의를 얻으면 주기적으로 방문해 나무를 돌보고 상태를 관리하는 업무를 한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 트리계의 산타클로스’라는 별명을 가진 에릭 파우즈 수석 정원사. 출처: 록펠러 센터
‘크리스마스 트리계의 산타클로스’라는 별명을 가진 에릭 파우즈 수석 정원사. 출처: 록펠러 센터

올해 록펠러 센터 크리스마스 트리는 맨해튼에서 북쪽으로 약 210km 떨어진 뉴욕주 올버니의 러스 가족이 기부했습니다. 7살 아이를 키우는 젊은 미망인이 집안에서 60년 넘게 키워온 노르웨이 가문비 나무를 기증했는데, 몇 년 전 별세한 남편이 기억되길 바라며 기부했다고 합니다.

올해 뉴욕 시민과 관광객을 맞을 준비를 마친 채 점등을 기다리고 있는 록펠러 센터 크리스마스 트리.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올해 뉴욕 시민과 관광객을 맞을 준비를 마친 채 점등을 기다리고 있는 록펠러 센터 크리스마스 트리.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일단 나무가 선정되고 나면 나무와 관련된 일거수 일투족은 하나하나가 뉴욕의 ‘뉴스’가 됩니다. 며칠 날 베어질 예정인지, 누가 나와서 어떻게 배웅을 했는지까지도요. (보통 나무가 베어진 동네를 출발할 때면 동네 사람들이 잔뜩 나와 록펠러 센터로 떠나는 나무를 환송해줍니다.)
나무는 ‘0000년 록펠러 센터 크리스마스 트리’라는 자랑스런 현수막을 붙이고 길이 35미터의 초대형 트레일러에 실려 2~3일에 걸쳐 수백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해 맨해튼으로 들어옵니다. 올해는 11월8일 토요일 아침에 들어왔는데 인근 블록이 통제되고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사히 빌딩 앞에 오는데 성공했습니다. 매년 똑같지만 매년 신나고 매년 설레는 모습입니다.

록펠러 센터 바로 앞 건물에 있는 방송사 NBC가 투데이 모닝쇼를 통해 지난 11월 맨해튼에 도착한 나무를 생중계하는 모습. 출처: NBC 캡쳐
록펠러 센터 바로 앞 건물에 있는 방송사 NBC가 투데이 모닝쇼를 통해 지난 11월 맨해튼에 도착한 나무를 생중계하는 모습. 출처: NBC 캡쳐

나무는 한 달여에 걸쳐 세워지고, 펼쳐지고, 5만 개 넘는 LED 전구로 장식된 뒤, 무려 430kg짜리 크리스털 별로 꼭대기가 장식되고 나서야 시민들을 맞을 준비를 끝냅니다. 그리고 매년 12월 3일 열리는 록펠러 센터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식에서 드디어 그 첫 불을 밝히죠.
점등식이 열리는 날은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자칫 우연히 그 근처를 지나다 인파에 끼이면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오도 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을 겪을 수도 있거든요(제가 작년에 그랬습니다). 제가 뉴욕에 사는 동안 경험한 모든 행사 중 가장 사람이 많았던 행사였고, 자칫 위험할 수도 있겠다고까지 느껴졌던 행사가 바로 이 점등식이었습니다. 그만큼 인기라는 반증이겠죠. 그래도 록펠러센터와 NYPD(뉴욕경찰)의 운용 노하우로 올해도 별일 없이 행사가 잘 끝났습니다.

록펠러 센터 트리 점등식이 있던 12월 3일 낮부터 통행이 어려울 정도로 붐비는 록펠러 센터 인근 5번가.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록펠러 센터 트리 점등식이 있던 12월 3일 낮부터 통행이 어려울 정도로 붐비는 록펠러 센터 인근 5번가.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12월 3일 점등식 당일 낮부터 록펠러 센터 일대 6개 블록 통제에 들어간 NYPD의 모습.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12월 3일 점등식 당일 낮부터 록펠러 센터 일대 6개 블록 통제에 들어간 NYPD의 모습.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지난해 점등식 때 록펠러 센터 일대의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는 인파.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지난해 점등식 때 록펠러 센터 일대의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는 인파.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록펠러센터 트리는 크리스마스가 지난 뒤에도 1월 중순까지 자리를 지키다 철거됩니다. 뉴욕의 크리스마스를 위해 자신을 내 준 이 소중한 나무는 그 후 어떻게 될까요.
이 나무들은 매년 전시가 끝난 뒤 취약계층을 위한 집짓기에 매진하는 단체인 해비타트에 기증됩니다. 가공센터로 보내져 집짓기에 필요한 수십 개의 기둥으로 만들어지고, ‘록펠러 센터 크리스마스 트리’라는 불도장이 찍혀 누군가의 소중한 기둥이 되는 것이죠.

집 짓기 용 판자로 가공된 록펠러 센터 크리스마스 트리. 출처: 해비타트 인스타그램
집 짓기 용 판자로 가공된 록펠러 센터 크리스마스 트리. 출처: 해비타트 인스타그램

그렇다면 평범한 뉴욕시 거리나 가정 안에 서 있던 나무들은 어떻게 처리될까요. 집 밖 거리에 내놓으면 청소업체가 수거해가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엔 1월 초의 주말에 온 가족이 나무를 이고 지고 집 근처 공원을 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 할 일을 다한 크리스마스 트리를 뉴욕 공원국이 운영하는 공원으로 가져가면 나무를 파쇄해 우드칩(잘게 자른 나무조각)으로 만드는 일에 동참할 수 있거든요(기념으로 우드칩 한 봉지도 줍니다!).

‘멀치페스트’라 부르는 이 행사 동안의 주말을 ‘치핑 위크엔드’라고 부르는데 지난해 이렇게 뉴욕시에서 재활용된 나무가 4만6626그루에 달했다고 합니다. 우드칩은 나무 뿌리를 겨울 추위로부터 보호하고 나무를 심기 전에 땅 밑에 깔면 나무의 성장과 물빠짐에 큰 도움을 준다고 하네요. 뉴욕의 크리스마스 트리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제 할 일을 다하는 고마운 존재란 생각이 듭니다.

미국 작가 셸 실버스타인의 명작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마지막 장.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미국 작가 셸 실버스타인의 명작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마지막 장.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순간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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