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 독일인들 “뜨거운 지구보다 핵폐기물이 낫다”[시차적응]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3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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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나라 사람들은 왜 그렇지?’ 국제뉴스 속 궁금증을 콕 짚어 새로운 시각에 적응시켜 드립니다.
4월 16일 가동을 완전히 멈춘 독일 바덴 뷔르템베르크주에 있는 원자력발전소. 독일은 이 원전을 포함해 가동 중이던 원전 총 3기를 영구 중단함으로써 ‘탈원전’을 선언했다. 네카어베스트하임=AP 뉴시스
독일은 세계 처음으로 탈원전을 실행에 옮긴 나라입니다. 4월 16일 독일의 마지막 남은 원전 3곳이 모두 멈춰 섰습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원전을 서서히 줄여오다 이번엔 원전 가동을 완전히 중단한 독일이 한편으론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에너지 상황이 결코 만만치 않으니까요.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독일은 그동안 의존도가 높았던 러시아산 가스를 쓰지 못하게 돼 에너지 수급이 어려워졌습니다. 그 여파로 전기요금이 유례없이 치솟았습니다. 지난해 9월 독일의 가정용 전기요금은 전 세계 3위로 한국의 5배가 넘습니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전기나 냉난방비 급등을 피부로 실감하고 있을 독일인들은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어떻게 생각할까. 국내와 독일에 있는 독일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봤습니다. (참고로 독일 공영 ARD방송이 4월 독일 성인 1204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59%가 ‘탈원전 반대’였습니다.)

▽기자
독일 정부가 탈원전을 실행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팀
저는 기본적으로 ‘탈원전’에 반대하고, 특히 지금 이 시기에 탈원전하는 것에는 더더욱 반대합니다. 현재 우리는 1970년대 이래 최악의 에너지 위기에 처해 있으니까요. 지금처럼 우리가 가진 에너지원은 최대한 모두 활용해야 하는 시기라면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원전은 반드시 포함돼야 하지 않을까요.

▽베른하르트
과거 정부가 탈원전을 결정했을 때만 해도 독일엔 (거의 대부분 러시아산인) 가스라는 좋은 대안이 있었어요. 하지만 지난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에너지 수급 구조를 변화시키려 한다면 원자력을 그런 변화로 가는 ‘다리’로 사용하다가 재생에너지가 충분히 생산되면 그때 폐기하는 게 맞다고 봐요.

▽싸이
저는 장기적으로는 탈원전에 찬성해요. 하지만 지금 이 시기라면 탈원전은 시기상조예요. 원전을 더 짓자는 게 아닙니다. 에너지 상황이 안 좋은 만큼 이미 운영 중인 원전이라면 최대한 활용하자는 거죠. 원전 건설에는 천문학적 비용이 들기 때문에 원전은 장기간 사용할수록 경제성이 높아져요. 현재 독일에 있는 원전은 당연히 가동 가능 연한이 남아 있고요.


● “탈원전한다며 석탄 발전 재가동하는 게 무슨 친환경인가”
▽기자
탈원전이란 목표에는 공감할 수 있지만 시기가 언제인지도 중요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독일인들은 최근 에너지 위기로 인한 전기요금 급등을 피부로 실감할 것 같은데 실제 생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있나요?

▽팀
전기요금이 많이 오른 건 맞지만 임금도 같이 올랐고 정부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조금을 주고 있어서 일상생활에 큰 충격은 없습니다. 다만 기업들은 직격타를 맞았겠죠. 비싼 에너지 비용은 독일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으니까요. 다만 저는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한다는 의미에서 에너지를 절약하고 있어요. 전쟁 발발 이후 히터는 오직 곰팡이가 안 생길 정도로만 써요. 불필요하게 냉난방을 안 하기 위해서 계량기로 온도와 습도를 정확하게 확인하고 있고요.

▽싸이
지난해 겨울에 정말 힘들었어요. 가스요금이 엄청 올랐거든요. 히터를 최대한 조금 틀어야 하니 평소 겨울보다 옷을 더 많이 껴입었고 이불, 담요도 여러 겹 덮고 잤어요. 또 예전엔 회사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동시에 여러 개 켜두고 일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어졌어요. 다만 기존에 하던 문화생활을 포기한다든가, 식비를 아껴야 할 만큼 큰 타격은 없는 것 같아요.

▽베른하르트
독일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에너지 가격이 가장 비싼 나라에 속합니다. 재생에너지 비중을 계속 높여가고 있는데 아무래도 재생에너지는 생산 비용이 많이 드니까요. 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한 각종 정책적 비용이 에너지 가격에 반영되어 있기도 하고요. 최근엔 정부가 한술 더 떠서 가계에 더 큰 부담을 줄 수 있는 ‘히트펌프’라는 냉난방장치 설치를 의무화하기로 해서 논란이 되고 있어요.

(4월 독일 정부는 내년부터 화석연료 보일러의 신규 설치를 금지하고, 새로 설치하는 보일러의 65% 이상을 재생에너지로 가동해야 한다는 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정부는 이 기준에 부합하는 냉난방장치인 ‘히트펌프’ 설치 보조금을 일부 지원하기로 했지만 여전히 고비용이어서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다.)

4월 15일(현지 시간) 독일 뮌헨에서 원자력발전에 반대하는 시민단체가 탈원전 기념 집회를 하고 있다. 현수막에 탈원전과 에너지 구조 전환을 주장하는 문구가 적혀있다. 뮌헨=AP뉴시스


● ‘핵폐기물 덜한 더 뜨거운 지구’ vs ‘핵폐기물 있는 덜 뜨거운 지구’
▽기자
탈원전으로 에너지 비용 부담이 커지더라도 미래세대를 위해 감수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팀
오해가 없어야 하는 게 저는 강력한 환경 보호론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탈원전을 하겠다면서 부족한 에너지를 보충하려 석탄발전소를 재가동한 정부에 더욱 분노하는 겁니다. (지난해 독일 정부는 러시아산 가스 공급 급감 문제 해결을 위해 석탄화력발전소를 재가동했다.) 환경을 고려한다면 ‘탈원전’보다 ‘탈석탄’이 우선이에요. 원전의 가장 큰 환경 문제는 ‘핵폐기물’이에요. 하지만 미래세대에 ‘핵폐기물은 덜하지만 더 뜨거워진 지구’를 남겨주는 쪽과 ‘핵폐기물과 함께 덜 뜨거운 지구’를 물려주는 쪽 중엔 후자가 낫습니다. 더 나아가 석탄 사용을 늘린 정부의 결정으로 정부의 다른 저탄소 정책에 대한 신뢰마저 손상됐다고 봅니다.

▽싸이
저 역시 인류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가 기후 위기라고 생각해요. 근데 기후 위기를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은 화석 연료죠. 아무리 핵폐기물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화석연료가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은 원전보다 훨씬 더 큽니다. 다른 나라 정부들이 원전을 유지하는 이유가 석탄 사용을 줄이려는 목적도 있는데 탈원전을 위해 석탄발전소를 재가동하는 건 시대를 역행하는 거죠.

▽베른하르트
환경보호 정책은 두말할 것도 없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독일의 환경정책은 고비용만 수반하고 기후 위기 해결에는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있어요. 우선 석탄발전소 재가동으로 이제 유럽 국가들 중 거의 가장 더러운 ‘에너지 믹스(에너지 생산을 위한 발전 수단의 구성비)’를 보유하게 됐죠. 환경보호를 위해선 모든 기술들에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해요. 단순히 탈원전을 해버릴 게 아니라 소형모듈 원자로나 핵융합 등 신기술을 개발하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독일 정부가 2030년까지 전체 전력의 최소 80%를 재생에너지로 생산하겠다는 계획인데 재생에너지가 어느 정도 확보되면 그땐 탈원전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팀
재생에너지는 당연히 이상적인 수단이죠. 재생에너지가 충분히 저장돼 있었다면 탈원전을 해도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고 기후 위기는 코앞에 다가왔잖아요. 파리기후협약(지구 평균 기온 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로 제한)을 지키길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상주의에 빠져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베른하르트
정치인들은 종종 너무 먼 미래의 야망적인 목표를 정하고 당장 지금 취해야 할 것들을 등한시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독일 정부는 탄소중립적인 원전 대신 석탄 발전을 하는 게 일시적 문제라며 무시하고 있죠. 하지만 석탄 발전으로 인한 문제가 구체화할 때 그들은 이미 은퇴해있겠죠. 해가 화창하고 바람이 많이 불어 태양열이나 풍력으로 에너지를 충분히 생산하는 날도 있겠지만 재생에너지만으론 전체 전력의 5%도 채 생산하지 못하는 날들도 있다는 걸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독일 라프샤겐에 설치된 태양광 발전 단지와 풍력 터빈. 지난해 독일에서 태양광과 풍력을 이용해 생산한 에너지는 전체 전기 생산량의 36.4%였다. 라프샤겐=AP뉴시스


● 안전한 독일 원전 버리고 원전 확대하는 프랑스서 에너지 수입
▽기자
핵폐기물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일본 후쿠시마 사태에서 보듯 원전의 안전성도 진지하게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요?

▽싸이
물론 사고 가능성을 100% 부인할 순 없죠. 하지만 엔지니어로서 독일 원전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안전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독일 원전은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안전 규정하에 건설되고 가동돼요. 게다가 독일은 지진도 거의 발생하지 않습니다. 굳이 따진다면 테러 위험 정도가 우려할 만한 일이예요.

저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NRW)에 있는 아헨이란 도시에서 사는데요. 여기서 벨기에까지는 차로 15분 거리에요. 독일 내 다른 남부 도시들보다 더 가깝죠. 근데 벨기에는 노후 원전을 계속 연장해서 가동하고 있어서 최근 유럽에서 반발이 커요. 이런 원전을 옆에 두고 있는 상태에서 독일에 있는 효율적이고 안전한 원전을 닫아버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독일은 섬나라가 아니에요. 국가 간 거리가 가까운 유럽에선 다른 나라와 정책의 발을 맞추는 게 필수적이에요. 우리가 아무리 원전 3기 가동을 중단해봤자 프랑스는 50기 이상의 원전을 갖고 있고 여기에 6기를 더 짓고 있어요.

▽베른하르트
독일에선 50년이 넘게 원전이 운용되면서 심각한 사고가 발생한 적이 없어요. 기술적으로 앞으로 수년은 더 사용할 수 있고요. 그런데 보세요. 러시아산 가스와 원전을 사용하지 못하니 독일에선 에너지가 부족해졌어요. 그러자 안전하고 현대적인 우리 원전을 내버려두고 전력의 60~70%를 원전에서 생산하는 프랑스로부터 일부 전력을 수입하죠.(독일은 프랑스로부터 전력을 일부 수입하고 있지만 더 많은 전력을 수출하고 있다.) 정작 우리는 프랑스 원전의 안전성을 전혀 규제할 수 없는데 말이죠. 얼마나 모순적인가요.

▽팀
독일이 ‘재생에너지로의 전면적인 전환’이란 목표를 이루기도 전에 에너지난을 겪게 돼 주변 유럽국들에 손을 벌리는 날이 더 빨리 올지도 모릅니다. 이미 프랑스 에너지를 수입하는 것처럼요. 유럽 다른 나라 친구들도 저한테 “독일 정부의 탈원전 결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아요. 결국 본인들이 도와주게 될 거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을 거예요.

이청아기자 clear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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