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전범에게 연옥은 없다” vs 러 “전쟁 아닌 특수 군사작전”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2월 24일 17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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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네 대통령이 전쟁 선포하는 동영상, 지금 틀어볼까요?”(주유엔 우크라이나 대사)

23일 오후 10시 40분경(현지 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실. 우크라이나 사태 해법을 논의하기 위한 안보리의 긴급회의에서 세르히 키슬리차 유엔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가 바실리 네벤쟈 러시아 대사에게 쏘아 붙였다.
● “전범에게 연옥은 없다”
9시 반 시작된 회의는 순회 의장국 러시아의 주재로 각 이사국 대사들이 발언하면서 차분하게 진행됐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기조발언에서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당신 군대의 우크라이나 공격을 멈춰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군사작전을 명령했다는 긴급 외신이 타전되자 분위기는 일순 바뀌었다. 각국 대사들은 저마다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며 뉴스를 확인했고 배석한 자국 외교관들과 귓속말을 나눴다.

이사국들 발언이 끝난 뒤 초청국인 우크라이나의 차례가 됐다. 키슬리차 대사는 작심한 듯 네벤쟈 러시아 대사를 노려보며 말문을 열었다.

“나는 오늘 러시아 대사에게 우크라이나를 공격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할 참이었다. 그런데 48분 전에 당신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다 필요 없어졌다. 지금 바로 당신네 군대가 우크라이나 도시를 폭격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힐 것을 요청한다.”

그는 이어 “당신도 스마트폰이 있으니 당장 (세르게이) 라브로프(러시아 외무장관)에게 전화하라. 지금 답을 못 준다면 러시아는 안보리 의장 자리를 포기해야 한다”며 “내가 지금 당신 대통령 동영상을 이 자리에서 틀어볼까”라고 일갈했다.

네벤쟈 대사가 “당신 발언할 때 나한테 질문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을 막아서자 키슬리차 대사는 “어쨌든 당신(네 나라)은 전쟁을 선포했고 유엔은 전쟁을 막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언성을 높였다. 궁지에 몰린 네벤쟈 대사는 자기 나라 장관을 한밤중에 깨우지는 않겠다면서 “(러시아가 선포한 것은) 전쟁이 아니라 특수 군사작전”이라고 궁색하게 말했다.

키슬리차 대사는 자신의 발언을 마친 뒤 다시 한번 마이크를 잡았다. 이어 네벤쟈 대사를 향해 “푸틴과 라브로프에게 전화해 공격을 멈추라고 말하세요. 전범들에게 연옥(煉獄)은 없습니다. 그들은 지옥으로 직행입니다, 대사님”이라며 발언을 마쳤다.
● “책임은 오로지 러시아에”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주유엔 미국 대사는 이날 회의 초반 “너무 늦기 전에 물러서라”며 러시아를 향해 침공 계획 철회를 촉구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침공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발언을 신청하고는 안보리에 24일 결의안을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토머스그린필드 대사는 “이 공격이 가져올 죽음과 파괴의 책임은 오로지 러시아에게 있다. 전 세계는 러시아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며 강력한 대응 방침을 밝혔다.

통상 안보리 회의는 이사국 발언을 차례로 들은 뒤 끝내지만 이날은 미국을 비롯해 영국 프랑스 아일랜드 등에서 잇달아 추가 발언을 통해 러시아의 침공 행위를 비판하면서 1시간 30분가량 이어졌다.

네벤쟈 러시아 대사는 “이번 위기는 우크라이나의 행동에서 비롯됐다” “러시아의 작전은 우크라이나 동부 러시아계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등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날 안보리 회의는 군사강국의 횡포에 무기력한 유엔의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편 안보리 회의에 앞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교장관은 “러시아에 대응하지 않으면 국제질서가 붕괴된다”며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개입을 호소했다.

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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